“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
오늘은 일어나 오늘 복음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을 읽는 순간
<고생>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사람을 보고 삶도 보자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먼저 고생하는 분들을 떠올렸습니다.
제 주변의 고통 받는 분들 그래서
제가 매일 기도해드리는 분들을 떠올렸습니다.
암으로 고생하는 분,
우울증과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는 분,
자녀들과 배우자 문제로 고생하는 분,
장애와 장애로 인한 병들로 고생하는 분,
성폭력으로 자신의 존재와 삶과 관계가 망가진 분,
술과 성 중독으로 자신도 괴롭고 주위 사람도 괴로움을 주는 분.
그리고 한 분 한 분을 더 생각하다보니 그분들 중에는
고생하는 것을 이해받는 고생하는 분과
고생하는 것을 이해받지 못하는 고생하는 분이 있으며,
고생하는 것 때문에 화를 내는 분, 곧 고통 안에 갇혀 있는 분과
고생하는 것 때문에 기도를 하는 분, 곧 하느님께로 달려가는 분이 있었고,
그래서 고생 때문에 불행한 분과 고생은 하더라도 행복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저와 같이 살고 있는 형제들을 봤습니다.
우리 형제들에게는 고생이 있을까, 없을까?
있다면 이 형제에게는 어떤 고생이 있을까,
저 형제에게는 또 어떤 고생이 있을까 본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크게 제가 반성이 되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에게도 이러저러한 고통이 있는데
제가 고생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형제를 보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제가 형제들의 고통과 고생을 몰라주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형제의 나쁜 것만 보고 형제의 고생은 보지 못한 것이며,
더 고생한다고 생각하는 멀리 있는 분들의 고생만 보고
별 고생 없이 편히 산다고 생각하는 가까운 형제들의 고생은 못 본 겁니다.
앞서 봤듯이 이해받지 못하는 내 형제들의 고생과 불행,
이해하려고 하지는 않고 그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만을 하는 자기중심적인 저의 욕심과 사랑 없음이, 둘 다 가련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저의 고생도 들여다봤습니다.
나는 고생하는 사람인가, 아무 고생 없이 사는 사람인가?
나의 고생은 무엇이며, 이해는 받고 있는가, 받지 못하고 있는가?
역시 이런 면에서도 저 자신이 크게 반성이 되었습니다.
저는 자주 다른 사람에 비해서 고통이 없고 행복한 것이 미안하다고 하고
저의 고통은 보려하지 않고 남의 고통을 보며 저를 자위하려고 하였으며,
저의 고통을 제 스스로 위로하려 하지 않고 남의 위로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크게 반성이 된 것은
다른 사람의 고생은 가지고 하느님 앞에 갔지만
제 고생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가지 않은 점입니다.
말하자면 ‘주님 쟤 지금 고생하니 도와주세요.’는 하였지만
‘주님 제 고생을 보시고 저를 가엾이 여기소서.’는 하지 않은 겁니다.
오늘 탈출기에서 하느님은 당신 이름을 야훼, 곧
‘있는 분’, ‘존재하는 분이라고 모세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있는 분’이시지만 나와 상관없이, 나의 고생과 상관없이
있는 분이 아니고 모세를 보내어 고생하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끄집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분이신데 저는 이런 하느님을 저와 상관없이, 저의 고생과는 상관없이
있는 분으로 하느님을 제쳐놓고 살아 왔음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