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의 전례는 여성에게 인색합니다.
남자하고 비교할 때 축일로 지내는 성인이 성모 마리아를 제외하고
다른 여자 중에는 없고 유일하게 막달라 마리아만 축일로 지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여자에게 인색한 교회가 왜 막달라 마리아게만은
축일로 지내는 것을 허용했을까요?
그러나 실은 교회가 남자들에게 관대하고 여자들에게는 인색한 것이 아니라
축일은 사도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인데 사도들이 다 남자들이고
여자 중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만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여자 중에서 유일하게 사도이고,
오늘 감사송을 보면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고 얘기하며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라고 막달라 마리아를 드높입니다.
그렇다면 왜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사도인데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들에게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사도들 중의 사도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이 비어있다고 얘기하는데 이 남자들은 무덤에 와
비어있는 무덤만 확인하고는 무덤덤하게, 아니 아주 무심하게 돌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만 보고 부활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죽음만 본 것이 아니라 부활까지 보는데 그래서
감사송은 또 이렇게 마리아를 드높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살아계셨을 때나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리고 무덤에 계실 때나 부활하셨을 때,
그 모든 때에 주님을 찾고 주님과 함께 있었던 분은 막달라 마리아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도들은 주님께서 살아계실 때만 따라다녔고
수난의 현장에서는 도망쳤으며, 베드로와 요한만 수난의 현장에 있었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얘기하지 않았으면 무덤에도 가보지 않았을 것이고
가 봤어도 부활하신 주님을 더 이상 찾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도들을 주님 부활의 증인이요 선포자가 되게 하였으니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고 함이 지극히 마땅하지요.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게 이렇게 되었고, 이럴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님께 받은 사랑이 컸기 때문이겠지요.
일곱 마귀에 사로잡혔던 그녀를 주님은 구해주셨으니 말입니다.
하나의 마귀에 사로잡혀도 그 고통과 불행이 대단한데
일곱 마귀에 사로잡힌 그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불행했겠습니까?
마귀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마귀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고,
그래서 마귀 외에는 그 무엇과도 단절이 되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완전히 단절이 되는 것이지요.
단절이란 사랑과 가장 정반대의 상황이잖습니까?
완전한 단절이란 사랑의 완전한 불가능이지요.
그런데 우리 가운데 마귀에 사로잡히지 않았는데도 완전한 단절을 살거나
겉으로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지만 허울뿐인 관계를 사는 사람도 있지요.
내가 만일 얼마간 관계를 유지하고 산다면 그 얼마 때문에 관계를 잘 살고
사랑을 잘 사는 사람인 양 그렇게 허울 속에서 계속 살지 말고
오늘 과감하게 허울을 걷어버리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되게 해달라고 빕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