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으면,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오늘 복음의 비유는 충실한 종, 슬기로운 종의 비유인데
여기서 주님께서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두 가지 요건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주인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이 맡긴 일을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요건을 두 가지로 얘기했지만
오늘 비유 말씀을 잘 뜯어보면 실은 한 가지로 신원의식의 문제입니다.
오늘 비유를 보면 주인이 안 계시고 그래서
자기가 마치 주인인 듯 행세를 하고 있으며
그래서 자기가 종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의 예를 들어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종이 본래 자기의 신원에 충실하면 종의 역할에 충실하게 되어 있습니다.
옛날 제가 흥부전에서 마당쇠 역할을 할 때 제 대사는 하나뿐이었습니다.
“예!”라는 대사 하나뿐이었는데 경우는 두 가지였습니다.
주인인 놀부가 부르면 “예”하고 달려가는 것이고,
주인이 일시키면 “예”하고 가서 하는 것이었지요.
먼저 주인이 부를 때 “Ad Sum” 다시 말해서 “저 여기 있습니다.”하고
달려가기 위해서는 늘 주인에게 깨어있어야 하고 그래야 종인 겁니다.
늘 주인 곁에 있고 늘 주인에게 깨어있어야 종이지
종이 주인 곁이 아니라 자기가 있고 싶은 곳에 떨어져 있거나
주인이 불러도 그것을 듣지 못한다면 그런 종은 종이 아니겠지요.
영어로 말하면 늘 “Stand by”상태의 존재이고, 곁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영어 “Stand by”가 옆에 서다는 뜻이시지만
실제로 많은 경우 행동을 하기 전의 준비상태를 말하는 거지요.
종이 왜 주인 곁에 서 있겠습니까?
주인의 마누라나 자식이기에 가족으로서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시키면 즉시 수행하기 위해 종으로서 곁에 서 있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종이란 주인이 시키면 즉시 “예”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입니다.
시킨 일이 싫다고 거절하거나 할 수 없다고 빼거나
지금 내 일이 바빠서 그거 할 시간이 없다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늘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종의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러니까 주인이 맡긴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주님 집안의 가솔 또는 식솔들을 잘 돌보는 것이고,
잘 돌보는 것이란 군림치 않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가정으로 말하면 인자한 어머니와 지혜로운 아버지처럼
수도원으로 치면 외부일이 아니라 형제들을 위해 봉사하는
원장이나 당가처럼 하느님 집안의 가솔들을 돌보는 겁니다.
저의 경우 초등학교 때는 이 마당쇠 역할에 불만이었지만
선생님이 하라고 하시니 어쩔 수 없이 했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에 들어오고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어렸을 적 연극에서의 이 종의 역할이 어쩌면 운명인 듯,
신앙의 말로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저의 역할을 미리 섭리하신 듯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저의 별명을 “당쇠”로 쓰고 있습니다.
잘은 못하지만 주님이 하라시는 대로 하겠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종의 역할을 슬기롭고 충실하게 수행한다는 말은
능력으로 잘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로 수행하겠다는 뜻이고
할 수 있다면 사랑의 의지로 충실히 수행하겠다는 뜻이지요.
저도 여러분도 이럴 수 있기를 오늘 자신을 위해 기도해봅시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