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소작인들에게 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오게 종을 보냈다.”
우리는 3주 계속해서 포도밭 비유를 듣습니다.
연중 25주일에는 포도밭에 일찍 나와 일한 사람에게나
늦게 나와 일한 사람에게나 하느님은 같은 일당을 주신다는 비유를 들었고,
지난 주 26주일에는 포도밭에 일하러 가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가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가지 않은 아들과
안 가겠다고 했지만 뉘우치고 포도밭에 가서 일한 아들의 비유를 들었는데
오늘은 포도밭의 또 다른 비유, 곧 소작인의 비유를 듣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비유를 시작하십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아라.”
그러니까 앞의 두 주는 포도밭에 개인으로 가서 일하는데 비해
이번 주는 개인이 아니라 소작인으로서 일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님 포도밭의 단순 노동자/일꾼인가, 소작인인가?
단순 노동자와 소작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단순 노동자와 소작인은 차이가 없습니다.
포도밭의 소유권이 자기에게 없다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소작인이란 그야말로 소작인이고 일꾼이나 마찬가지로 소유권자가 아닌데
가끔 소작인이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소유권자로 착각하거나
아예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도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비유를 통해
소유권 없는 우리의 가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다른 한 편
내거로 착각하고 소유하려는 교만과 욕심을 버려야 함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기업과 하느님의 사업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교만과 욕심을 버려야 함은 물론이고,
하느님 기업과 사업을 내 거로 여기는데서 오는 근심걱정도 버려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회가 자기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상대로
가지 않는 것을 보고 생애 후반에 무척 고뇌를 하였습니다.
그 때 프란치스코는 기도 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수도회를 누가 세웠냐? 너나, 나냐?
이 수도회가 네 것이냐 내 것이냐?”
그런데 오늘의 비유는 단순 일꾼과 소작인의 차이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단순 노동자/일꾼은 하느님의 기업이나 사업에 아무 책임이 없고
그저 시키는 대로 일하는 비해 소작인은 소출의 책임이 있는 존재지요.
그러면 소출의 책임이란 무엇입니까?
책임은 하느님께 지지만 책임의 내용은 하느님 백성에 대한 겁니다.
구약에서 포도밭이란 이스라엘 백성이고
그러기에 포도밭의 소출을 낸다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 백성답게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명을 누리며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살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책임을 다하면 백성이 생명을 누리며 잘 살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책임지는 것,
이것이 버겁고 그래서 이 책임이 싫습니다.
내 것도 아닌 하느님의 포도밭을 버거운데도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니.
그래서 이것이 짐인지, 아니면 영광인지 모르겠는 때가 있는데
사랑이 없으면,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없으면 짐일 뿐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지니고 있으며, 그리고 그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에 감사하면 소작인인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파트너가 되고
하느님 사랑의 공동경작자가 되는 것이니 그것이 무한 영광일 것입니다.
나를 당신의 파트너 삼고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큰 책임을 맡기시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