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제가 매일 기도하는 지향 중에 올해 들어와서 두 자매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 조카며느리이고 다른 하나는 아는 분의 딸입니다.
제 조카며느리는 임신을 했는데 먹는 것을 다 토하고
그래서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정도로 입덧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입덧을 좀 심하게 한다고 제가 기도를 하겠습니까?
제가 그 아이를 위해 특별히 기도를 한 이유는 그 아이가
제 조카와 유학을 갔는데 거기서 임신을 했고 그때도 입덧이 너무 심하여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결국 사산을 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후 한동안 아기가 다시 들어서지 않다가 올해 다시 임신을 했는데
이렇게 고생하는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참으로 대견합니다.
그렇게 입덧의 고통과 사산의 아픔이 있었고 그 고통과 아픔이
또 다시 예견되는데도 그것을 각오하고 다시 임신을 하였으니 말입니다.
제가 아는 분의 딸은 아기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자신의 암이 발견되어
어린 아기를 놔두고 지금 항암치료를 받는데 먹는 대로 다 토한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아리고 아프고 그래서
다른 누구보다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그 독한 항암치료를 받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걱정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린아이의 엄마로서 심리적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들지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이들이 애를 잘 낳고 암을 이겨내게 해달라는 것도 있지만
오늘 주님께서 영적인 엄마가 되는 것이 행복하다고 하셨듯이
이들이 애를 낳고 암을 이겨낸 다음에
그저 한 아이의 엄마들이 아니라 영적인 엄마들이 되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이 고통을 통해 아이의 엄마만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하느님이 그들 안에 들어와 그리스도의 엄마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한 아이가 들어서고 태어나려면 입덧을 해야 하듯
제 안에 하느님이 들어서려면 저도 영적인 입덧을 해야 하고
무당이 접신을 하기 위해서는 무병을 앓아야 하듯
저도 하느님을 모셔 들이기 위해서는 신병神病을 앓아야 하는데
제 조카며느리가 고통이 얼마니 클지 알면서도 받아들였듯이
저도 영적인 입덧과 신병을 감수하고 감당케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영적인 입덧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입덧의 이유가 과학적 생물학적으로 무엇인지 모르지만
제 나름대로 신앙적인 이유를 생각해보면 <고통스런 사랑 현상>입니다.
한 생명이 내 안에 들어서는데 고통 없이 들어서게 할 수 없도록
하느님께서 그렇게 마련하신 것이 입덧이고
그것이 사실은 모든 진정한 사랑의 법칙입니다.
진정한 사랑치고 아프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은 없습니다.
이런 것이니 영적인 입덧이란
하느님 사랑 때문에 모든 고통을 받아들일 때 오는 것이고,
하느님 사랑 때문에 고통 주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때 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나를 사랑하고 만족을 줄 때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그 만족에 머물고 더 이상 하느님을 찾지 않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군가 나에게 터무니없이 고통을 줄 때
억울해하거나 분노하지 말고 영적인 입덧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음식으로 그를 생각하면 어떨까요?
얼마나 아름다운 영적인 입덧인지...
신부님의 오늘 묵상 곱씹씁니다.
모든 상황에서도 억울해 하거나 분노하지 말고
영적인 입덧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음식으로....
영적인 입덧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음식이라는 걸 몰랐네요~ 생명수와 같은 말씀 한 모금에 목마른 제 영혼이 갈증을 면합니다.
모든 선이시고/ 으뜸 선이시고 온전한 선이시며, 홀로 선하신 나의 아버지! 거듭거듭 감사와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