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한 주일
생명의 빵에 대해 지루하다싶을 정도로 들었습니다.
요한복음답게-부정적으로 얘기하면 너절하게-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것 같은 얘기를 들은 것입니다.
6장의 마지막인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드디어 도대체 뭔 얘기냐고 투덜거립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투덜거리니 주님께서는 한 술 더 떠서
이제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많은 제자들은 아예 떠나가 버립니다.
눈에 보이고 배를 부르게 하는 빵을 달라고 하니
생명의 빵을 얘기하시고
알아듣게 해달라니 생명의 말씀에 대해 얘기하시니
이런 엇박자도 없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엇박자는
주님께서는 영적인 빵과 영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제자들은 육적인 빵과 말을 듣고자 하니
어쩔 수 없다할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은 그때 제자들만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지금의 우리도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도 알아듣기 어렵지만
생명이 무엇인지,
영이 무엇인지,
영이 생명을 준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참으로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생명과 생명을 사는 것,
죽음과 죽음을 사는 것.
살지만 무엇을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다릅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살아있는 사람은 숨을 쉬고
죽은 사람은 숨을 쉬지 않습니다.
의식이 있건, 없건 숨을 쉬고 있으면
그래서 살아있다 합니다.
숨을 쉬어야지만 생명은 유지됩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보아
생명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고,
밖에서 생명이 들어오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숨은 생명의 들이킴입니다.
창세기의 주님은 흙으로 아담을 빚으심으로 존재를 있게 하시고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생명을 살게 하십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하느님의 숨으로 생명이 아담 안으로 들어오고
예수님의 숨으로 성령이 제자들 안으로 들어옵니다.
아담의 숨으로 하느님의 숨을 들이키고
제자들의 숨으로 예수님의 숨을 들이킵니다.
숨과 숨이 통함으로,
숨이 숨을 들이킴으로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숨이 막히면,
숨이 숨을 들이키지 않으면 생명은 단절되고 죽습니다.
같은 이치로
곡기를 끊으면 죽는 것처럼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생기라는 명령에 존재가 생명을 지닙니다.
生命은 生기라는 命의 실현인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떠나서는 존재도 없고,
존재한다 하여도 살아있다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빵에 대해 지루하다싶을 정도로 들었습니다.
요한복음답게-부정적으로 얘기하면 너절하게-
그 얘기가 그 얘기인 것 같은 얘기를 들은 것입니다.
6장의 마지막인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드디어 도대체 뭔 얘기냐고 투덜거립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투덜거리니 주님께서는 한 술 더 떠서
이제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많은 제자들은 아예 떠나가 버립니다.
눈에 보이고 배를 부르게 하는 빵을 달라고 하니
생명의 빵을 얘기하시고
알아듣게 해달라니 생명의 말씀에 대해 얘기하시니
이런 엇박자도 없다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엇박자는
주님께서는 영적인 빵과 영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제자들은 육적인 빵과 말을 듣고자 하니
어쩔 수 없다할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은 그때 제자들만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지금의 우리도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씀도 알아듣기 어렵지만
생명이 무엇인지,
영이 무엇인지,
영이 생명을 준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참으로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생명과 생명을 사는 것,
죽음과 죽음을 사는 것.
살지만 무엇을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다릅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살아있는 사람은 숨을 쉬고
죽은 사람은 숨을 쉬지 않습니다.
의식이 있건, 없건 숨을 쉬고 있으면
그래서 살아있다 합니다.
숨을 쉬어야지만 생명은 유지됩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생명이 끊어지는 것을 보아
생명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고,
밖에서 생명이 들어오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숨은 생명의 들이킴입니다.
창세기의 주님은 흙으로 아담을 빚으심으로 존재를 있게 하시고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생명을 살게 하십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하느님의 숨으로 생명이 아담 안으로 들어오고
예수님의 숨으로 성령이 제자들 안으로 들어옵니다.
아담의 숨으로 하느님의 숨을 들이키고
제자들의 숨으로 예수님의 숨을 들이킵니다.
숨과 숨이 통함으로,
숨이 숨을 들이킴으로 생명이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숨이 막히면,
숨이 숨을 들이키지 않으면 생명은 단절되고 죽습니다.
같은 이치로
곡기를 끊으면 죽는 것처럼
생명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생기라는 명령에 존재가 생명을 지닙니다.
生命은 生기라는 命의 실현인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떠나서는 존재도 없고,
존재한다 하여도 살아있다 할 수 없습니다.
움직일 수 있도록 날마다 말씀을
먹는 일에 힘쓰겠습니다.
신부님 말씀 속에 영생의 길을 봅니다.
숨을쉬어도 죽은 목숨입니다.
순간 순간 기억하겠습니다.!!
生= 人+ 土 이래야지만 산다는 어찌보면 쉬운 논리인데 너무 멀리서 찾았던 거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이 생할려면 기본에 충실해서 되야겠지오.
인간을 흙으로 빚으신 그 분의 뜻만 잘 헤아린다면 영생의 즐거움도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