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참으로 절절합니다.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고 완벽할 것 같은 바오로 사도에게도
이런 한계가 있었고, 한계에서 오는 고뇌가 있었음이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와 같은 말씀은 차라리 절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절규絶叫란 무엇입니까? 절망의 상태에서 부르짖고 외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저는 바오로 사도의 절규가 제게 절망적으로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위안이 되고 안도감과 용기를 갖게 하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은 완벽한 성인도 이렇게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절망적으로 외치고 있구나 하는 위안이고 안도감이고 격려인 거지요.
그리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그래서 절망스럽지만
덕분에 우리는 구원자가 필요하고 구원자를 찾게 되는 것이고,
다행스럽게도 구원자가 계시기에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절규에 이어 재빨리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깊은 성찰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과 수도생활에 대해서 말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얘기를 현대의 심리학적으로 접근을 하면
사뭇 다르게 풀어 얘기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내가 하고 싶거나 하기 싫거나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가 하는 거라는 말은
오늘의 심리학에서는 두 개의 내가 있는 것으로 얘기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사도 바오로가 오늘의 심리학을 배웠다면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내 안에는 두 개의 내가 있는데
이 두 개의 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과학적으로 접근했을 거고
그래서 구원자 따위는 얘기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실로 우리 신앙인들이나 심지어 수도자들도
한계와 마음의 상처들을 이제 신앙으로 치유하고 구원 받으려 하지 않고
심리학적으로 극복하고 치유하려고 합니다.
말하자면 의사에게 갈 것을 왜 하느님께로 가느냐는 태도인 거지요.
사실 감기 걸렸을 때 의사한테 가고 하느님께 갈 필요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이렇게 바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밥해주는 사람이 있고 사 먹을 식당이 널려 있으니
엄마가 필요 없다는 것과 같은 생각이라고.
하느님을 내 필요충족의 하느님으로만 생각할 뿐
사랑의 하느님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의사가 있으니 하느님은 필요 없고
필요가 있다면 전능하신 하느님이지 사랑의 하느님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유능한 엄마와 사랑의 엄마 중에 어떤 엄마가 좋고, 필요합니까?
철부지 때는 어머니가 뭘 주셔도 필요 없다고 매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필요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받았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한 두 가지인데 수녀님들이 반찬을 많이 해주십니다.
좋아하는 것만 먹으려다가 사랑을 생각하여 다른 것도 먹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는 것입니다.
미성숙할 때는 사랑은 필요 없고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진정 필요한 것은 사랑이고, 사랑이 진정한 치유입니다.
다행히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전능도 하신데
사랑의 하느님과 전능하신 하느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어떤 하느님을 택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