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전에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게 되었습니다.
치유 받은 이방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똑같이 치유 받은 다른 아홉 유대인은 구원 받지 못하고
이방인 하나만 구원을 받았다는 얘기인지,
구원 받았다는 것이 과거의 병의 치유만을 의미하는 것인지,
다른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 겁니다.
우리가 구원을 얘기하면서 보통 영혼구원과 육신구원을 구분하는데
육신구원은 열 사람 다 받았지만 유대인들에겐 그 육신구원이
과거적으로 끝나고 영혼구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뜻일까요?
다시 말해서 과거구원이 미래구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뜻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오늘은 이런 뜻에서만 묵상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나눠 생각지 말고
영혼과 육신이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
그래서 구원도 육신의 구원과 영혼의 구원으로 나누지 말아야 하지만
병이 나은 행복으로 그 구원이 그치는 사람이 많기에 나눠생각해봅니다.
제 생각에 신앙인에게는 행복과 구원이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것은 행복하다는 다른 말입니다.
구원을 받아서 행복하게 되었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신앙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행복은 있어도 구원은 없으며
병이 치유되었어도 치유된 자기만 있지 치유해준 분은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병이 들어 아플 때는 병의 고통만 있고
병이 나았을 때는 병으로부터의 해방만 있지
병중의 하느님도 안 계시고 병의 치유자인 하느님도 안 계십니다.
사랑의 발생이 없고 인격적인 관계의 발생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병원에 가서 병을 고치고 난 뒤
병이 나았으니 그만이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병을 고쳐준 의사는 돈 받았으니 그것으로 끝이라는 태도지요.
그런데 정녕 주님의 치유가 인술이 아니고 상술에 불과합니까?
하느님은 아무 것도 받지 않으시고 거저 치유해 주시는데
그것이 어찌 은총이 되지 못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이 되지 못하고 구원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베트남을 갔을 때 “Thank you”가 베트남 말로 뭐냐고 물으니
‘깜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우리가 한자어 感謝를 감사라고 표현하듯
‘깜응’이 한자어 感恩의 베트남어 표현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무릇 모든 감사感謝는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어야 하고
특히 우리 신앙인은 은총에 감사하는 것이어야 하지요.
은혜 중에서도 은총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사랑이고
그래서 병의 치유를 통해 은총체험과 구원체험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의 사랑과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밥을 먹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맘이 없다면
밥만 처먹은 것이고 아무런 은총과 사랑의 체험이 없는 것이며
복음 말씀을 듣고 우리가 ‘하느님 감사합니다.’는 말을 하지만
정말로 감사한 마음이 없다면 이 역시 복음을 귀로 듣기만 할 뿐
하느님도, 하느님의 사랑도, 하느님의 구원도 발생치 않는 겁니다.
구원은 병의 치유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을 만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실히 깨닫는 오늘이기를 바라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