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기를 바라십니까?
어쩌다 보니 태어난 존재이기를 바라는 분은 없겠지요?
어머니들이 무심코 얘기하다 보면 출산 계획이 없었는데
덜컥 임신을 하여 어쩔 수 없이 낳았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 얘기를 그 자녀가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낙태치 않고 낳아줬다고 고마워할 자녀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부모가 원치 않은 탄생이라고 자신을 생각하거나
사랑 없이 자신을 낳았다고 생각하여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실수로 낳으셨다면,
실수는 아니지만 사랑 없이 낳으셨다면,
우리가 필연이 아니라 우연으로 태어났다면
우리는 자기 인생을 사랑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이 오늘 에페소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우리의 존재와 생명이 계획되었을 뿐 아니라
천지창조 이전부터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되었다고 하지요.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 보통의 인간도 이러할 진데 성모 마리아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개인을 위한 계획에 따라 태어났지만
성모 마리아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계획에 따라 태어나셨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구원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풀어 얘기하면 비구원이란 무엇이고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가난과 병고와 온갖 어려움 가운데 있는 것이 비구원이고
이런 것들로부터 우리를 구해내는 것이 구원입니까?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것들로부터의 구원을 구원이라 생각하겠지만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 안 계심>이 비구원입니다.
이는 어린아이에게 비구원은 병고나 가난보다도
부모가 없고 무엇보다도 엄마가 없는 것이 비구원인 것과 같지요.
그런데 어찌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안 계시는 겁니까?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에는 계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데
하느님은 어찌하여 우리에게는 안 계시는 겁니까?
그런데 <하느님 안 계심>은 하느님이 우리를 거부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거부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죄이고 그래서 구원이란
죄로 인한 하느님 부재의 이 비구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거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실 때부터
당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의지 때문에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당신을 거부할 것을 내다보셨고 그래서 이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미리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육화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잉태할
어머니를 미리 선택하셨고 그 어머니를 원죄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는 “하느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녀를 통하여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시고, 성자의 죽음을 미리 보시고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으니”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을 거부하여 죄를 짓는 우리와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셔야 하고,
그분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셔야 했기에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이렇게 되도록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이 육화와 수난이고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입니다.
휴! 새벽부터 어려운 얘기를 풀어가다보니 머리에 쥐가 날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