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베드로서의 말씀은 가슴을 찌릅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주님께서 오시니 깨어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었지요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언젠지 모를 오심을 깨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계신 주님을 우리가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아
우리가 맞아들여주기를 주님이 오히려 기다리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는 묵시록의 다음 말씀이 딱 맞아떨어집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여러분도 보신 적이 있으실 텐데 주님께서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그림입니다. 그 중에서도
윌리암 H 홀튼이 그린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등불을 들고 문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문에 고리가 없어서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아무리 주님께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해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등불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주님이 등불을 들고 계시고,
우리가 기다려야 하는데 주님께서 기다리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주님이 오실 길을 닦으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하늘에서 이 세상에 오실 길을 우리가 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이 세상에 오는 길은 주님 자신이 바로 그 길이시기에
주제넘게 우리가 그 길을 내겠다고 할 필요도 없고, 낼 수도 없습니다.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시는 길은 주님 친히 내어 오시고,
이미 우리 동네와 우리 문 앞까지 와 계시기에
우리 밖의 길이 아니라 안의 길을 내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죄를 치워버리는 것, 곧 회개인데
우선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요 막았던 것을 치우는 것으로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적대감을 우리 안에서 몰아내는 겁니다.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게라사 지역에 들어서자 더러운 영들이
급히 달려와 엎드려 주님이 그곳에 들어서시는 것을 막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처럼 더러운 영은 게라사라는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는 아무도 그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고 그럼에도 자기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곳에 누가
들어서려고 하면 하느님이든 누구든 상관없이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며
괴롭히려고 침입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다 이렇습니다.
사랑 없는 사람은 관계를 거부하기에 누구도 상관이 없으며,
나 외의 다른 존재는 다 침입자이기에 자기 안에 갇혀 살며,
사랑으로 다가와도 간섭이거나 침입이기에 입구부터 원천봉쇄 하려 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원천봉쇄 하기에 제 생각에 단절이 자장 큰 죄입니다. 하여
문을 열고 봉쇄를 푸는 것만으로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지만
우리가 더 잘 맞이하려면 길을 잘 정비해야 하는데 그것이 뭘까요?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죄, 곧 욕심과 허영과 같은 죄가 있고,
사랑과 반대가 되는 죄, 곧 미움과 분노와 시기질투와
여기서 비롯된 억압과 폭력과 같은 죄가 있겠지요.
이런 죄를 우리 마음 안에서 치워버리는 것이
우리 안의 길을 닦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