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저는 이 말씀이 오래 전부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 사이에서 어떤 것이 더 쉬우냐고 물으신 것 같은데
그 답을 주지 않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답을 주시는 대신 사람의 아들에게 죄 용서의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시고는 일어나 집으로 가라는 말씀만 하십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의 권한이니
죄의 용서를 인간이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거였지요.
그리고 병이 든 것은 죄의 벌로 하느님께서 내리신 거라고 믿었지요.
그러니까 뒤집어 얘기하면 병이 치유되면 죄가 용서받은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병을 치유해주심으로 죄의 용서에 대한 권한이
당신에게 있음을 일거에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통해 치유까지 일거에 이루신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질문을 던지시고 여러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죄의 용서가 어려운 것을 넘어 불가능한 것이지만
당신에게는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으로 죄를 용서한다는 한 마디 말로
병의 치유까지 하는 것이 번거롭지 않고 오히려 쉬운 일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성서 신학자들은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지만
오늘 저는 이렇게 이해를 했는데 정작 제가 이 질문에 대해 생각케 된 것은
이런 신학적인 궁금증 때문이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죄의 용서와 병의 치유 중에 어떤 것이 내게 쉬운 일인가?
여러분에게는 어떤 것이 더 쉽습니까?
이런 질문인데 사실 이런 질문을 할 때 제 안에는 이미
병의 치유보다 죄의 용서가 더 어렵다는 답이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의사가 아니기에 병의 치유도 할 수 없는 사람이고,
의사라 할지라도 불치병도 있으니 병의 치유가 쉬운 게 아니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죄의 용서가 인간으로서 쉽지 않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병의 치유는 인간이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죄의 용서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권한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권한이 주어졌더라도 용서할 능력이 없다는 뜻인데
죄의 용서란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만큼 되어야지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칙칙한 비유이긴 하지만 이런 비유가 가능하겠습니다.
누군가 나의 정원에 똥을 싸놨습니다.
볼 때마다 화가 나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문지로 그것을 덮어놨는데 그래서 안 보일 때는
용서한 것 같다가도 어쩌다 보게 되면 다시 밉고 화가 납니다.
우리의 용서란 것이 대부분 이런 식입니다.
똥을 치워야 하는데 치우지 않고 덮어 두기에
용서한 것 같은데 다시 미움과 분노가 일어나곤 합니다.
똥을 치울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사랑이 없으면 용서가 안 됩니다.
아기의 똥도 사랑스러운 어머니 사랑과 같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엄마라도 똥이 사랑스러울 리 있겠습니까?
똥은 애기 똥이라도 더럽고 그래서 치워버려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무도 아기를 사랑하기에 더러운 것을 더럽다 피하지 않고
아기를 위해 똥을 치워주지요.
그러므로 하느님 사랑에 도달해야지만 용서가 쉽고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