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배우러 오라고 초대하시는 것인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의미 안에서 이 말씀을 이해하면
주님께서 가르쳐주러 오셨으니 우리도 배우러 오라고 초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동네에 마음 치유에 대해 아주 유명한 강사가 왔는데
마음 치유에 대해서 배우고 싶으면 오라는 것과 같은 얘기이지요.
그러면 주님은 무엇을 가르치시고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 것입니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느님 안에서 힘을 얻는 법이고
다른 하나는 무거운 짐을 지면서도 안식을 누리는 법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힘을 얻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오늘 이사야서에서 하느님은 마치 힘자랑하시는 분 같습니다.
그것도 젊은이와 비교하여 지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제가 저의 건강을 자랑하며
젊은 사람이 왜 그 모양이야, 하며 은근히 기죽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자랑할 것이 없어서 힘자랑을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격려로서 당신의 힘은 결코 고갈되지 않으니
아무 걱정을 하지 말고 당신에게서 맘껏 힘을 얻으라는 뜻이지요.
사실 우리는 힘이 없어서 조금 주고 나면 이내 고갈이 되고 지치지요.
그래서 잘 쉬고 보신탕이니 보약이니 해먹어도 힘이 회복되지 않기에
당신에게서 힘을 받아야지만 회복된다고 하느님은 말씀하시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어떻게 힘을 얻어야 합니까?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것을 통칭하여 기도라고 하는데
힘을 달라고 청원기도를 하면 되는 것입니까?
예, 진정으로 힘을 청하면 되지만 바로 이 <진정으로>가 문제입니다.
그저 입으로만 달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믿으며 청해야 하고,
아니, 사실은 청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기만 됩니다.
이는 마치 휴양림에 들어가 호흡을 하면 그 기를 받는 것과 같고,
건전지를 충전기에 꽂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힘들지 않게 짐을 지는 법이고
무거운 짐을 지면서도 안식을 누리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힘들지 않게 짐을 지고
무거운 짐을 지면서도 안식을 누릴 수 있는지 알고 싶지요.
저는 사랑으로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짐을 지면 그리 될 수 있다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오늘 당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시며
그래서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짐도 가볍다고 하시고
우리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지면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멍에 자체를 거부하고 그래서 메려고 하지 않지요.
멍에란 것이 원래 짐을 나르는 도구이기에 좋을 리 없는데다
국어사전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에 있어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하듯
마음이나 행동을 억압하는 것이니 마음으로부터 멍에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니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란 이런 거부하는 마음이 아니라
마땅히 메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배낭이나 차량의 안전띠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처음에 안전띠를 맬 때는 답답해했는데 안전을 위해 매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속 매는 버릇을 들이니 이제는 매야 마음이 편안합니다.
배낭도 옛날에는 짐을 지는 거였는데 이제는 배낭이 편하니 거부감이 없고
그래서 지금은 사람들이 패션처럼 배낭을 메고 다니고 가볍게 짐을 집니다.
‘왜 나에게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은 편치 않고 짐은 무겁지만,
‘왜 내가’가 아니라 ‘마땅히 내가’ 또는 ‘당연히 내가’라고 하는 순간, 짐은
무거워도 마음은 안식을 누리고, 또 짐도 더 가벼워짐을 배우는 오늘입니다.
마땅히 메야 할 것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네, 그렇군요. 그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