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를 주고 있는 요한에게
사람들이 와서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제들과 레위인들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으로 표현하자면,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요한에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만큼 요한의 세례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었고,
그를 메시아로 생각했기에
그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였다면,
우리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면,
조금 더 나를 그럴듯하게 표현할텐데,
메시아까지는 아니더라도
메시아 비슷한 뭐라고까지도 표현할텐데,
요한은 그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표현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요?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예수를 말씀이라고 표현합니다.
말씀과 소리,
이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말씀도 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말씀은 그 안에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뒤집에서 이야기 하자면,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의 의미를 알아 듣지 못한다면,
그 말씀은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듯 자신을 굉장히 낮게 표현합니다.
나도 말씀이 되고 싶은데,
그는 소리에 머물러도 괜찮은 것처럽 보입니다.
한편 말씀이 소리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지만,
소리가 없다면 말씀은 전달되기 쉽지 않습니다.
물론 글로도 전달될 수 있지만,
소리로 전달되는 것이 더 쉽고 빠릅니다.
즉 말씀이신 성자를 쉽고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소리인 요한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요한은 말씀이 지닌 주인공의 자리보다는,
그 주인공을 세상에 알리고
그 말씀으로 세상을 이끄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말씀,
그 말씀으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그 말씀으로 사람들이 기쁨을 찾을 수 있다면,
나는 굳이 말씀이 되지 않아도,
소리일 뿐이지만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나도 그 말씀을 전하면서
그 말씀과 더 가까워지고
그렇게 하느님과 더 가까이,
하느님을 더 깊이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말씀이고 싶습니다.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굳이 말씀이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가 비록 소리일지라도
내가 소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때,
나는 그 누구보다도 말씀과 가까이 있을 수 있고,
그렇게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각자에게 물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나를 알게 되면서 하느님을 알게 되고,
그렇게 하느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하루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