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인과因果, 곧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흔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라고 질문을 던지는 그것입니다.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는 내가 이렇게 저렇게 잘해서 그 일이 생겼고,
내가 잘한 것이 없을 때에는 다른 누구의 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나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라거나
나의 탓이 없다고 생각될 때는 조상 탓이나 남 탓을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은 생각지 않는 철저히 인간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이것의 대표가 바로 불교의 연기론으로서
인과응보, 자업자득, 업보와 같은 말들이 여기서 나온 거지요.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도
나든 너든 인간의 마음이나 행위가 그 결과의 원인이라는 것으로
마음 안에 이미 결과가 있다는 유심연기론唯心緣起論까지 있지요.
예를 들어 마음보를 곱게 써야 좋은 일이 생긴다거나 복이 온다고 하지요.
인간이 마음만 먹었어도 그 안에 선 또는 악의 씨앗이 있어서
선 또는 악의 결과가 열매를 맺는다는 얘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차이인 겁니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이기에 하느님 없이
모든 인과 관계를 설명할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인간에 의한 인과 관계로
다 설명되지 않는 일들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믿고,
이것을 하느님의 섭리라고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는 페루지아와의 전쟁에서 져 포로가 되고,
감옥 생활 후 1년을 중병을 앓다가 살아난 뒤 다시 전쟁터로 나갑니다.
젊은 나이에 전쟁과 포로생활과 병상생활이라는 큰일을 내리 겪으면서도
이 일들이 왜 나한테 일어났는지 알아채지 못한 채 또 전쟁터로 간 겁니다.
사실 신앙인이라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자기 뜻과 다른 일이 벌어질 때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거지요.
결국 환시를 보고서야 자기에 대한 하느님의 더 큰 계획이 있음을 알고,
처음으로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느님의 뜻을 여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셉의 뜻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을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요셉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알지 못한 채 마리아와 약혼을 했습니다.
자기가 마리아와 결혼하는 것이 하느님의 구원계획임을 알지 못한 채
인간적인 이유로 그리고 자기 계획에 따라 약혼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나나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을 모른 채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이 벌어지거나 합니다.
어떤 때는 내 뜻대로 되고 어떤 때는 네 뜻대로 되지 않는데
그것을 우리는 성공이라고 생각하거나 실패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기준으로 하면 성공이나 실패이겠지만
하느님을 기준으로 하면 성공도 아니고 실패도 아닌
다만 하느님의 뜻일 뿐입니다.
내게 벌어지는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섭리를 보며
그 일들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그 일을 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요셉이 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