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편지는 어제 “그분 안에 머무십시오.”에 이어
오늘도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요한이 오늘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 짓지 않는다 하니
죄를 짓는 사람은 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 밖에 머문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하느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예를 들어 성당 안에 머무는 것일까요? 그러나 제 생각에
성당 안에 머무는 것이 하느님 안에 머무는데 도움 될 수는 있어도
성당 안에 머무는 것이 바로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은 결코 아니고
성당 안에 머물면서도 얼마든지 다른 것 안에 머물 수가 있지요.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첫째가고 중요한 것은 관심이 어디에 머무냐입니다.
그런데 관심關心이란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 ‘관’이란 우리말에 무엇에 관한 얘기라고 하거나
무엇에 관하여 생각해보라고 할 때의 그 ‘관’이 아닐까요?
이런 뜻이라면 관심도 무엇에 관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한자어의 관關이란 ‘빗장, 잠그다.’의 뜻입니다.
국경을 가르는 관문關門이라는 말의 그 ‘관’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關’이란 어느 것 또는 어느 곳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것 또는 다른 곳에는 빗장 지르고 닫아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뒤집어 얘기하면 어느 한 것이나 곳에 집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관심이 쏠리다’는 우리말의 경우처럼
어디에 관심을 갖게 되면 마음이 어느 한 쪽에 쏠리어
거기에 머물고 그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다른 쪽엔 그렇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관심關心이 그런 것처럼 관여關與나 관계關係도 그렇겠지요.
관심이 있는 것과 관계를 맺을 것이고
관심이 있는 일에 관여도 할 것이고,
관심이 많을수록 더 관계도 맺고 관여도 할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저희는 오랫동안 우선적 관심사라는 것을
매년 새해가 들면 정하곤 하였는데
근래에 와서는 우선적 관심사를 정하는 것에 소홀합니다.
그것은 작심삼일처럼 우선적 관심사를 정해놓고는
정작 거기에 관심을 두는 데 실패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고,
실패가 많았던 것은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관심사는 이것이지만
나 또는 우리의 실제적인 관심사는 저것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심사숙고하여 올해의 우선적 관심사를 정하였는데
한 해를 돌아보면 다른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산 적이 많았지요.
오늘 저희는 수도원회의를 하며 새로운 공동체이기에
이것저것 많은 것을 결정해야 하는데 그런 자잘한 것도 정해야 하지만
공동체 우선적 관심사와 같이 크고 중요한 것을 정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관심사가 각기 달라 공동의 우선 관심사는 정하지 못하더라고
저 개인적으로라도 올해의 우선 관심사를 정해야겠습니다.
그것은 요한의 권고처럼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하느님 안에 늘 머무는 것,
사람들과 함께 무슨 일을 하여도 저의 내면상태에 관심을 더 두는 것,
그렇게 됨으로써 무엇이건 사람으로부터 받기를 바라지 않게 되는 것,
이것을 저는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올해 우선 관심사로 정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