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랑-생명, 미움-죽음이 주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가 사랑을 하면 하느님께서 상으로
생명을 주시고 반대로 우리가 미워하면 하느님께서 벌로
죽음을 주신다는 그런 좁은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 얘기는 하느님께서 상과 벌로 생명과 죽음을 주지 않으셔도
사랑은 그 자체로 생명이고 미움은 그 자체로 죽음이라는 겁니다.
이 얘기는 또 미워하는 사람은 육신이 팔팔해도 죽음을 살고,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골골 죽어가도 생명을 산다는 뜻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리 살아있고 아무리 팔팔한 청춘이어도
그 사람 안에는 죽음밖에 없고 그래서 살의밖에 없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처럼 생명과 창조의 능력이 있다면
미워하는 것을 만들 수 있을까요?
싫어하는 것도 만들지 않는데 미워하는 것을 만들까요?
도공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을 만들어야지!’ 이럴 수 있을까요?
저의 경우 제 안에 미움이 있을 때는 아무런 창작 의지가 없습니다.
미움이 조금만 있어도 작은 곡 하나, 글 한 줄 쓸 수 없는데
죽이고 싶을 정도로 누구를 미워하면서 어떻게 생명 의지가 생기겠습니까?
반대로 사랑은 사랑이 고갈되지 않는 한 생명의지가 끊임없이 생겨나지요.
그래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생명의지가 계속 생겨나시기에
생기라는 명령을 계속해서 발출하셔서 생명이 생겨나게 하셨지요.
미움이 너무도 크면 미워하는 그도 죽이고 싶지만 나도 죽고 싶습니다.
죽이기 위해서나 살지 살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죽이고 난 뒤 자기도 죽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지요.
반면 사랑을 하면 뭣이건 살리고 싶을 뿐 아니라 잘 살게 하고 싶고,
자신도 사는 것이 즐겁고 기쁘고 그래서 활기가 찹니다.
그래서사랑은 결코 꽃만 살게 하지 않고 자기도 살게 하며
이것도 만들어보고 저것도 만들어보고,
이것도 심어보고 저것도 심어보고,
그리고 그것을 이 사람에게도 주고 저 사람에게도 줍니다.
미움으로 에너지가 뺏기지만 않으면
넘치는 힘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미움으로 에너지가 뺏기지 않는 어린이가
그 힘을 주체할 수 없어서 괜히 이것집적저것집적하고
만들었다 부수고 부쉈다 다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이란 어떤 사랑이라도 이렇게 생명을 살게 하고
인격적인 생명을 살게 하지만
영적인 사랑은 바로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하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지요.
지금 우리가 꽃을 사랑하고 반려 견을 사랑하더라도
신앙인이라면 여느 사람처럼 그저 사랑치 않고
이렇게 영적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하느님안에서. .
주신 사랑의 한 조각이라도 줄 수 있도록 사랑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