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인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 중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느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
예수, 특히 아기 예수는 성탄으로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이를 성대하게 경축하는 것이 성탄시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믿겠으며 믿지 못하는데 어찌 경축하겠습니까?
대충 아셨겠지만 지난달 저는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전과 달라진 것이 바로 성탄풍속이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였어도 전에는 성탄 장식이나 음악이
상점이나 길에 허용되었는데 그것이 금지된 것인데
성탄절은 중국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성탄절은 서구인들의 명절이라는 생각이 반영된 것인데
우리는 예수님이 인간 모두를 위해 오신 분이라고 믿고,
그래서 그 오심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축제를 지내지만
그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요한과 세례자 요한은 독서와 복음에서
각기 나름대로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 하고 있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 마르코복음의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단순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래서 생각을 더 하게 됩니다.
뭐냐면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증언하는 대목인데 이것이 제대로 증언이 될까 하는 점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 증언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증언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님이 인간으로 얼마나 위대한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증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요한이 얼마나 겸손하고 위대한지 증언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발 끈을 풀어줄 자격조차 없다고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겸손은
사실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없는 대단한 겸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낮춤에서 요한이 이렇게 낮추는 것을 보면 예수님은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고 생각기보다 요한의 그 위대한 겸손을 봅니다.
불교 우화에서 어떤 고승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니 구름떼같이
모인 군중은 하나같이 달은 보지 않고 고승의 손만 봤다고 군중의
어리석음을 얘기하지만 사실 어리석은 것이 우리 인간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꼬집는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인간과 이 세상을 넘어 하늘과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고
그래서 이런 어리석은 인간이 사람을 보고 이 세상 것을 보면서
하늘과 하느님을 보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린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이끄심이 없으면 인간이 위대할수록 인간은 우상이 되고
하느님은 이 우상에 가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래서 인간이 하나같이 너무나 거지같을 때 오히려
인간은 인간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하느님께 향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손가락이 성령의 손가락이 되기 위해서는
너무 아름다운 손가락들은 다 부러져야 한다는 얘기인데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이런 얘기가 됩니다.
요한처럼 그분은 갈수록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고도 해야 하지만
뭣보다 내 안에서 인위성이 없어지고 기도와 헌신의 영이 살아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와 헌신의 양이 성령을 우리 안에 모셔 들임으로써
우리의 증언이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증언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분은 갈수록 커지고 나는 작아지는 가난과 겸손의 <물의 세례>도 받고,
아예 나는 죽고 그분이 사시는 사랑의 <성령의 세례>도 받아야 함을
오늘 우리는 묵상하며 다가오는 주님의 세례 축일도 예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