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를 하면 싫어하실 분 많고
심지어 상처를 받으실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오늘은 오늘 복음에 비추어 얘기할까 합니다.
다름 아닌 상처 받았다는 얘기에 대한 얘기입니다.
힐링/치유라는 말이 참으로 유행처럼 많이 오갑니다.
제가 이 얘기를 처음으로 많이 들은 곳은 수녀원이었는데
차츰 저희 수도원에서도 이런 얘기를 많이 하고,
방송에서도 힐링이라는 말을 많이 하면서 유행이 되었습니다.
제가 거부감이 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과거보다 요즘 와서 이런 얘기를 많이 하는 것이
과거에는 상처 받는 일이 없었는데 요즘 와서
상처 받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얘긴가 하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과거에 받은 상처 때문에
현재도 살아가는데 매우 장애가 많다고 하는데
그것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평생 상처타령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저의 의심은 이것입니다.
전보다 상처가 많아진 것이 아니라 전보다 상처를 더 두려워하게 되었다.
벌써 상처를 치유하고 오히려 건강해졌어야 하는데 직면하여 고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상처에 계속 머물며 상처를 핑계 삼고 있는 것이다.
두 가지 의심의 공통점이랄까 접점은 두려움입니다.
전에 보다 오늘날 두려움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에 대한 저의 가여움이고 주님의 가여움일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두려움이 많은 것은
전보다 상처를 덜 받고 곱게 컸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상처 받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고 일상이었습니다.
일로 치면 요즘은 책상 위에서 컴퓨터로 일을 다 해 상처받을 일이 없지만
과거에는 들이나 공장에서 거친 일을 하기에 매일 상처를 받는 것과 같지요.
80년 대 제가 공장에 취직하려고 전봇대에 <직원구함>이란 광고를 보고
찾아가 사장과 수인사로 악수를 하면 거의 대부분 손가락 몇 개씩 없어서
섬뜩했던 적이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상처를 하도 많이 받으니 상처 받는 것을 의례 그러려니 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니 두려움이 없거나 적은데 요즘은 상처를 별로 받지 않고
왕자와 공주로 곱게 자라다보니 조그만 상처도 두려움이 되는 겁니다.
육신의 병을 치유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분명 치유해야 합니다.
그러니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제가 반대하는 것도 그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님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치유해야 하고 치유하기 위해 고통과 직면하고
그래서 상처를 평생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 치유보다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영혼의 상처랄까 병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얘기하는 구원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이 오늘 복음에서 병의 치유가 이뤄졌는데
복음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치유를 받았다고 하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치유를 넘어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주님께 치유를 받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한 육신의 치유에 그치지 않고 영혼까지 치유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육신 치유는 영혼 구원의 도구입니다.
주님, 오늘 저희에게 치유뿐 아니라 구원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