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을 보면 귀먹고 말더듬는 자가 매우 수동적입니다.
그는 주님 앞에 나올 때부터 사람들에 이끌려 나옵니다.
귀와 혀에 장애가 있기에 못 걷는 것이 아닌데도
이끌려 나온 것은 주님 앞에 스스로 나아올 용기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제 이 사람은 다시 주님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고,
치유 내내 주님이 하시는 대로 맡기고 수동적입니다.
사실 모든 치유는 수동적일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사 앞에 갈 때 나 아프다는 소리만 하지
깝죽대지 않으며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합니다.
다시 말해서 겸손하고 수동적입니다. 그래서
옷을 벗으라면 벗고 팔을 뻗으라면 뻗고,
혀를 내밀라면 내밀고 누우라면 눕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늘 복음처럼 치유해주실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처럼>이라면 어떻게 말입니까?
복음에서 주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보기 위해서
저는 오늘 주님의 동작, 행위에 집중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행위를 동사적으로 나열을 하면 이렇습니다.
그를 따로 데리고 나가시고, 손가락을 귀에 대시고,
혀에 침 발라 주시고, 한 숨을 쉬시고, 열리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오늘 주님의 행동에서 저는 한 사람을 위한 지극한 사랑을 느낍니다.
우선 장애인을 군중으로부터 따로 데리고 나가신 사랑이 특별합니다.
왜 따로 데리고 나가셨을까요?
숨기고 싶은 무엇이 있거나 비밀주의 때문일까요?
제 생각에 그런 이유들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
곧 한 사람에게 집중하시는 주님 사랑의 표시일 것입니다.
사랑의 사적계시와 같은 것이지요.
계시의 경우 루르드나 파티마처럼 공동선을 위해
하느님께서 공적으로 계시하시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면 사적인 계시를 하시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공동선을 위해 공적으로 치유하기도 하시지만
이번의 경우는 당신 사랑을 사적으로 보여주시고 싶었던 겁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각 사람에게 맞게 한 사람만을 위한 내밀하고 특별한 사랑도 하십니다.
저도 요즘 철이 들어서일까 이런 사랑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전에는 공적인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 편애를 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공평한 사랑에 신경 쓰고 그래서 웬만해서는 개인적인 사랑을
내색치 않음은 물론 아예 사랑의 표현 자체를 하지 않아서
냉정하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는데 다 저의 사랑이 일천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크고 완전할수록 사랑은 공평하면서도 특별한 사랑을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주님은 한 사람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 신명기를 인용하며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지만 실은 주님이 우릴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손을 귀에 대는 행위나 침을 혀에 바르는 행위나 한숨을 쉬시는 것은
“열려라”는 한 말씀으로도 충분히 고쳐주실 수 있지만
당신의 모든 것을 총동원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표시입니다.
이런 주님 사랑이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전달되는 오늘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