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고 난 뒤 저는 의기양양했는데
오늘 주제를 <보라-택하라-따르라>로 압축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이처럼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그러니까
‘불 보듯이 밝게 오늘 주제를 얘기할 수 있을까!’ 하였는데
약간은 자만하게 약간은 흡족하게 저를 생각했던 거였지요.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사는 길,
그것도 영원히 사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환자나 난치병자가 있는데 사는 길이 있다는 것과
그 길을 아는 것이 그에게는 아주 절실하게 다가오겠지요.
그래서 병원을 갔는데 믿었던 의사마저 원인을 모른다거나
알아도 치유의 방법을 모른다면 그 얼마나 암담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영원히 사는 길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우리는 그것이 중요한 만큼 절실합니까?
만일 그것이 우리에게 절실하지 않다면 육적이든 영적이든
-죽음은 나와 멀리 있다고 생각하거나
-이런 면에서 나는 지금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거나
-그런 문제는 아예 생각하고 싶지 않거나 이 셋 중 하나일 텐데
공통점은 죽음을 직면하지 않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문제를
보고 직면해야 하고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오늘 “보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보지 않고 뭘 보고 있는 겁니까?
이 중요한 것을 보지 않고 뭘 보고 있는 거고, 왜 보지 않는 겁니까?
제가 보기에 참으로 많은 사람이 스마트 폰 같은 것에서 시시껄렁한 것이나
뒤져보고 있는데 그것은 심각한 것을 직면하기 싫어 딴청을 피우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존재의 가벼움과 삶의 가벼움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선택이 두려워 딴청을 피우거나 아예 보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선택이 두렵습니까? 생명을 선택하면 되는데 뭐가 두렵습니까?
그것은 사는 길이 우리의 주님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죽어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길이라는 말씀이고
그 길을 가면 우리가 사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주님이 우리의 길이냐가 문제이고,
주님이 우리의 길이 되려면 나의 길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육신 건강을 예로 들면 심근경색이나 뇌경색이 심하게 왔습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사는 길은 뭐뭐를 끊고 뭐뭐는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끊어야 할 것은 좋아하는 거고 해야 할 것은 싫어하는 게 문젭니다.
해야 할 것이 좋아하는 거고 끊어야 할 것이 싫어하는 거면 무슨 문젭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가 영적으로 영원히 사는 길인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하십니다.
그런데 앞서 봤듯이 이게 너무 싫고 그래서 죽음이 임박하지 않는 한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젊어서 건강할 때는 담배 끊으라고 해도 끊습니까?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와야지만 끊지요.
그런데 우리 육신 건강의 신호 시스템은 예민해서
건강에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적신호가 잘 들어오는데
영적인 건강은 중병이 들어도 이상을 감지하지 못하고
뒤늦게 신호를 울리니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