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러 명절 중에서 설 명절입니다.
그래서 명절다운 명절과 설다운 설에 대해서 생각게 되었는데
명절다운 것이 뭔지 그리고 설다운 것이 뭔지를 더
선명하게 알기 위해 극단적인 반대상황을 생각해봤습니다.
먼저 명절에 저 깊은 산속에 나 혼자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봤습니다.
혼자라면 아무리 아름다운 곳에 있어도 명절이 명절답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새라도 지저귀고 토끼에다 강아지까지 옆에 있으면 좀 나을까요?
사뭇 나을 겁니다. 그러니 명절은 혼자 명절이 아니고, 같이 명절입니다.
그래서 찾아갈 곳도 없고 찾아올 사람도 없는 고아나 노숙자가 딱하고
와야 할 자식들이 찾아오지 않는 독거노인이 더 딱하고 더 생각납니다.
반대로 찾아갈 곳도 있고 찾아올 사람도 있는 나는 명절에 참 행복하고,
고아나 노숙자나 독거노인을 생각할 때 나는 행복에 겹고 미안합니다.
다음으로 명절에 병고든 생활고든 고통 중에 있는 분들을 생각해봤습니다.
지금도 제가 아는 여러분들이 병원 중환자실에도 계시고 응급실에도 계신데
내가 병원에 있든 사랑하는 가족이 병원에 있으면 명절이 명절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나와 가족이 명절을 지낼 수 있을 만큼이라도 건강하면
나는 참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명절을 참으로 기쁘고 감사하게 지내고,
마찬가지로 이 명절에 아파서 더 서럽고 더 괴로운 분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설다움을 생각해봤습니다.
명절 중에서 설 명절은 한 해를 시작하는 명절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 뜨기 싫은 사람처럼 새해가 희망차지 않는 사람은
설 명절이 참으로 곤혹스럽고 가족 친지와 만나는 것이 고문일 것입니다.
요즘 실업자들과 미취업 젊은이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겠지요.
그러므로 비록 좋은 일자리가 아니라도 일할 곳과 일거리가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더 나아가 감사하며 새해 희망을 이 명절에 설계하고
그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명절 희망의 말 한 마디 건네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에게건 나에게건 무엇이 희망이 되고, 누가 희망을 주겠습니까?
사람이 희망을 주겠습니까?
시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시편 1, 3)
나무가 시냇가에 심어져야지 모래밭에 심어지면 말라죽듯이
우리의 희망도 자기든 남이든 사람에게 두면 그런 희망은 희망이
되지 못하고 이내 실망이 되고 절망이 됨을 우리는 숱하게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희망을 준다면 준다고 해도 그 희망에 믿음을 둘 수가 없고,
그것은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하면서 인간이 주는 복
많이 받으라고 하는 것이면 그것이 축복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종종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하는 것이 제가 사제로서 하느님의 복을
빌어드리는 것은 여러분이 받으시겠지만 이 인간 김찬선이 주는 복을
받으라면 여러분이 받으시겠고, 그것이 여러분에게 행복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민수기가 얘기하듯 주님께서 복 주시기를 빌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조상신들이 주는 복 받으라고 뜻으로 새해 세배 드렸지만
이제는 조상신이 아니라 참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 받으라고 인사드려야지요.
진정 올해 여러분 오늘 민수기의 축복을 많이 받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축복을 나누는 한 해가 되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세번씩 읽겠습니다. 수사님, 저,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많은 그대)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