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들은 이사야서는 ‘-한다면’의 연속입니다.
-한다면 흡족하게 될 것이고, -한다면 기쁘게 될 것이고,
-한다면 어둠이 대낮같이 될 것이고,
-한다면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될 거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주제를 <행복의 조건-만족의 조건>으로 잡아봤습니다.
행복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 정의가 많고 그리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저는 행복을 <만족의 상태>라고 얘기하고 싶고,
그래서 행복의 조건과 만족의 조건은 같은 거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만족이란 욕구만족이나 욕구불만이라는 용례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욕구, 욕망, 욕심 이런 것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며
이런 것들이 채워졌을 때 얻거나 갖게 되었을 때 성취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욕구하거나 욕망하거나 욕심내는 것을 소유함으로써
만족을 얻으려고 하고 그때 행복을 느끼곤 하지요.
그런데 우리 인생의 많은 경험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기를 바라거나,
우리에게 만족을 주었던 것들이 우리를 배반하는 경험이 많습니다.
누군가에게 만족을 주기를 바랐는데 그가 만족을 주지 않거나
만족을 줬던 것들이 싫증이 나거나 오히려 허무를 남기거나 하는 거지요.
이 세상의 만족들은 하나 예외 없이 <싫증>과 <허무>를 결과로 남깁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가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하면
주님께서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리라.”
우리가 남을 흡족하게 하면 흡족하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남을 흡족하게 하면 나도 흡족하게 됩니다.
흡족케 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흡족케 할 수만 있다면
나도 흡족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흡족케 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도 그가 너무 깐깐해서
여간해서는 만족케 할 수 없다는 그런 뜻에서라기보다는
남을 흡족케 할 만한 나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에서입니다.
그를 만족케 할 만한 나의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이 먼저 나를 충만케 하기 때문이지요.
제 지론이 사랑이건 미움이건 남에게 가기 전에
먼저 나를 채우고 그리고 넘쳐서 남에게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내 마음에 사랑이 가득한 경험이 다들 있으시지요?
그래서 짝사랑이라도 하는 것이 좋은 것이 바로 이런 이치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남이 아니라 자기 충만을 위해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서는 다른 차원의 만족과 행복을 얘기합니다.
우리가 남을 흡족케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흡족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만족은 셀프 사랑의 만족과 인격적 사랑의 만족의 차이이고,
인격적 사랑의 만족도 인간끼리의 인격적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인 사랑에서 오는 만족입니다.
셀프 사랑이라. 예, 저는 셀프 사랑이라고 말을 만들어봤습니다만
굳이 어느 누구를 사랑하지 않아도 자신을 사랑할 수도 있고,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그가 내 사랑의 유인誘因이 아니라
내 사랑이 그 자체로 그를 사랑하게 하는 유인인 것이지요.
누구의 사랑에 의지하지 않는 이 셀프 사랑이 은근히 매력적이고 특히
상대에 의해 사랑이 좌우되고 흔들릴 때면 더더욱 이 사랑이 매력적입니다.
분명 이 사랑이 매력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 사랑의 유혹에 넘어가
이 사랑에 안주해서는 안 되고 더 높은 인격적 사랑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상대에 의지하지도 그 사랑에 좌우되지도 않으면서도
인격적인 사랑을 하게 하는 더 완전하고도 흡족한 사랑,
그것이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