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 장소는 산위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 산위에서 하느님을 만나면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해처럼 빛나게 된다는 것이고, 달리 말해 신화神化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처럼 빛나게 되고 신화되는 것이 저절로 되거나
공짜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늘 사순 2주일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저절로도 아니고 공짜도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까?
뇌물을 바치듯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예물을 많이 바쳐야 된다는 겁니까?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 곧 공로를 많이 쌓아야 한다는 겁니까, 뭡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러 산을 오르지만 바칠 예물이 없습니다.
아무 것 없어도 되고 예물이 필요하다면 그 바칠 예물조차
‘야훼 이레’ 곧 하느님께서 마련하실 겁니다.
이것이 잘 표현된 예물 기도가 다음의 연중 주일 예물 기도입니다.
“하느님, 하느님께 봉헌할 예물을 마련해 주시고,
이 예물을 저희 정성으로 받아 주시니, 자비를 베푸시어,
이 제사를 저희 공로로 여기시고, 더 많은 상급을 내려 주소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물을 마련할 필요가 없고
우리는 그저 하느님 계신 산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누가 하느님의 산으로 오르겠습니까?
“하느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 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라는 시편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면 다시 묻게 됩니다.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할 헛 군데가 어디입니까?
이 세상이고 그래서 이 세상 문제에는 정신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느님의 산에 오르려면 이 세상을 떠나면 되고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미련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기의 다른 이름이 바로 봉헌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싫거나 염세주의자이기에 이 세상을 버리거나
이 세상이 소중하지 않아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버리는 것이기에 봉헌입니다.
그냥 버리면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지만
하느님께 바치면 소중한 것을 봉헌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아브라함이 너무도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것이요,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 성부의 사랑하는 외아들의 봉헌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봉헌을 보면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그리고 오늘 바오로 사도의 서간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두 문장에서 공통어는 가장 소중한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여기서 성자의 말을 들으라는 것은 그저 귀로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이 성자께서 복음의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라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주님을 따라 타볼산에서 내려와 해골산으로 오르면 주님처럼 신화됩니다.
그러기 위해 프란치스코의 다음 권고를 마음에 새깁시다.
“여러분에게 당신 자신 전부를 바치시는 분이 여러분 전부를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것 그 아무 것도 여러분을 위해 남겨 두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