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 입성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예고를 세 번째로 하시는데
제자들은 수난을 예감하고 각오하기보다는 수난과 반대되는 것을
예감하고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그동안 여러 차례 얘기한 것 같은데
미래 자기에게 닥칠 것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대와 각오로서 기대는 좋은 것을 기대하지만
각오는 나쁜 것을 각오하고, 경우에 따라 최악도 각오합니다.
이런 두 가지 태도의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보통 좋은 것을 기대하면 거의 대부분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게 되지만
최악을 각오하면 그 어떤 결과도 최악보다는 좋은 것일 확률이 높지요.
최악을 각오한다는 것은 내가 기대하는 좋은 것은 하나도 없는,
즉 퍼센트/%로 치면 0%의 선을 기대하는데 1%의 선만 나와도
행운이 되고 50%의 선이 나오면 요즘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대박입니다.
다시 말해서 최악으로 죽을 것을 각오하면 죽지 않고
손가락 하나 부러진 것도 다행이라고 또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의 경우 한두 번으로 안 되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세 번째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죽음을 각오하기보다는 아주 좋은 것을 기대하고 있지요.
고배苦杯를 각오하라고 하시는데 축배祝杯를 기대하고 있는 겁니다.
운동 경기 결과를 얘기하면서 자주 쓰는 표현이
우승을 기대했는데 고배를 마셨다고 하지요.
아무튼 주님께서는 당신이 마실 쓴 잔을 너희도 마시겠냐고 하시자
그들은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마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당신이 마실 ‘쓴 잔’이라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그 쓴잔이 승리의 축배가 쓴 술이던지,
아니면 승리 전에 잠시 겪을 수난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무엇을 청하는데
지금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청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랬지만 참으로 많은 성소자들이
수도생활이 뭔지도 모르는 채 수도원 입회를 청합니다.
상당수가 수도생활이 그리 쉬운 거 아니라고 예고해도
잘 안다고 하지만 나중에 보면 대부분 환상을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곧 수도원은 천사들만 사는 줄로 알고 있었고
그러지 않자 크게 실망을 하고 많은 사람이 수도원을 떠나는데
제가 청원장을 할 때 한 그룹은 100% 수도원을 떠나기도 했지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미래를 다 알면 누가 수도원 들어오겠습니까?
이런 사람인 줄 알면 누가 그와 결혼을 하고,
결혼 생활이 이런 것인 줄 알면 얼마나 결혼을 하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요즘 수도원도 안 들어오고 결혼도 안 하는 젊은이들은
옛날의 우리하고 비교할 때 좋게 얘기하면 미래 환상이 없고
나쁘게 얘기하면 최악 너머의 선을 기대할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늘 제자들은 선을 기대했는데
최악을 넘는 선인 줄 모르고 도전을 하였고
주님 말씀대로 결국 최악 너머의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최악 너머의 선을 각오하고 도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