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은 모든 것을 다 잃고,
그리고 고생을 쫄쫄이 한 뒤 정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정신이 들긴 들었는데
시작일 뿐 정신이 완전히 그리고 제대로 들어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는 마취를 하고 수술을 한 뒤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정신이 들기 시작하지만 아직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작은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 집을 떠났기에
아버지 집의 풍요를 못 누리고 생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지금의 궁핍과 고생의 과거적 원인을 깨달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깨닫기 시작할 때 먼저 지금까지 잘못 살았음을 깨닫는 것,
내가 참 바보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잘못과 바보스러움을 깨닫고,
바보스러움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음을 깨달은 작은 아들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바보스러웠음을 깨달았다면 이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바보스러워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이제 바보스러움을 깨달았으니 진리도 깨닫고
진리에 따라 살기로 다짐하고 진리의 길을 가야 하겠지요.
자기의 바보스러움에 대한, 다시 말해서 주체에 대한 깨달음에서
진리에 대한 객관적인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삶의 진리를 깨닫고
삶의 진리를 따라 살기로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욕심 때문에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하였지만
그 소유욕이 과욕이요 죄요 지금 모든 상실의 원인이었음을
깨닫고 이제는 무소유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진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계적 진리를 살아야 합니다.
욕심을 부린 죄보다 더 큰 죄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떠난 것이요,
아버지와의 관계, 곧 사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께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회복하려는 것이 많습니다.
부를 잃은 사람은 부를 회복하려 하고
건강을 잃은 사람은 건강을 회복하려 하며
명예를 잃은 사람은 명예를 회복하려 하는데
우리가 상실을 가장 아파하고 그래서 회복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랑과 관계의 상실이며 그중에서도 아버지와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떠났기에 자기는 아들의 지위를 잃었고,
그래서 이제부터는 자신을 품팔이꾼으로 써달라고 합니다.
물론 아버지는 그럴 수 없지요.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아들이지 품팔이꾼이 아닙니다.
품팔이꾼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버지께는 무척 서운하고 섭섭한 거지요.
아버지의 자비를 못 믿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자녀들이 죄를 많이 지었으니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아들이 아니고 일꾼이라고 하면
이것이 관계의 회복이고 부모인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순절에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들로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버지께 돌아가고 아들로 돌아가는 것이 관계의
진정한 회복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바보스러웠음을 깨달았다면 이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
그런데 삶의 진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관계적 진리를 살아야 합니다.
...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들로 아버지께 돌아가는 삶이기를 제 자신은 희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