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사순 제 4 주일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죄를 덮은 것.
구원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믿어 얻은 것.
먼저 구원은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죄를 덮은 거라는 점을 보려고 하는데
오늘 사순 제 4주일은 사순주일 중에서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자줏빛 제의 대신 장밋빛 제의를 입어도 되는 주일이고
그래서 오늘 첫째 독서는 이스라엘이 그 많은 죄에도
하느님의 자비로 이방인 왕을 통해 포로생활을 끝내게 됨을 노래하고
입당송은 그래서 이에 대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그런데 이스라엘의 해방은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힘을 길러 전투에서 승리해 얻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페르시아 왕 키루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해방시켜 준 덕입니다.
이 말을 바꿔 얘기하면 구원은 우리가 자신의 덕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구의 덕으로 또는 덕분으로 구원을 얻게 된 거라는 얘깁니다.
우리는 누구 덕분에 잘 얻어먹었다고 흔히 얘기합니다.
자기의 돈은 하나도 없고 아무 공로도 없이 공짜로 음식을 먹었고,
그것도 아주 잘 먹었을 때 그렇게 얘기하곤 하지요.
그런데 공로는커녕 오히려 하느님께 죄를 지었고,
그래서 구원은커녕 벌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인데,
그런데도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하느님 자비의 덕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들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덕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은 순전히 하느님의 자비 덕이고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아드님의 수난 덕인데
정말 우리 인간이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 오늘 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은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은총에
우리가 채워야 할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라는 얘깁니다.
우리는 개신교 신자들한테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돌발질문을 받곤 하지요.
이는 자기들은 구원받았다고 자신을 하고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식이기에
불쾌하게 생각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기분이 나빠도 반성할 점이 있습니다.
구원을 주셔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평양 감사도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느님께서 아무리 구원을 주신데도 싫으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모욕은 잘 받아도 은총은 잘 받지 않고
고통과 시련은 잘 받아도 구원은 잘 받지 않습니다.
모욕은 보고 은총은 보지 못하고,
고통과 시련은 보고 구원은 보지 못하기 때문인데
그런데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가
바로 하느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라는 말이 있고,
‘님을 봐야 뽕을 따지’라는 말이 있는데
하느님을 봐야지 아드님도 보고 은총을 얻으며
은총을 받아야지 구원도 받는 것임을 묵상하는 사순 제 4주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