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오늘 이사야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하고
당신의 새 창조에 대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시겠다고도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당신의 새 창조에 대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새롭게 창조된 하늘과 땅에 대해 기뻐 즐거워하시며
우리도 그 기쁨과 즐거움에 초대를 하시는데
우리는 모두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습니까?
제 생각에 두 부류로 갈릴 것입니다.
기뻐 즐거워하는 부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로.
그러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싫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현재가 만족스러운 사람,
지금, 이곳이 좋은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좋을 리 없겠지요.
천지개벽天地開闢이 일어나면 지금 기득권층은 망하여
지금 가지고 있고 누리는 것을 다 잃게 될 겁니다.
이들은 하느님이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원치 않음은 물론
하느님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왕실관리의 경우
아들이 죽을 지경이 아니면 예수님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쁘게 맞이하고 즐거워할 사람은
이들과는 정 반대로 지금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
괴로운 사람, 억압을 받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루하루 사는 것이 힘들고 너무 괴로운 사람은 이 세상이 빨리 끝나거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것이고,
온갖 억압으로 신음하는 사람은 억압자가 빨리 없어지거나
억압자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구원자 하느님을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사실 죽음이 해방이요 구원인 사람이 참으로 많고 그래서 저를 찾아와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저는 자주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 중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하루빨리 이 세상에서 그를 데려가주시라고 주님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가 바라고 하느님께서도 바라시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갖게 되는 것보다 하느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사랑이 구원이고 사랑하는 분이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있는 사람이 불행한 것이 아니고
사랑이 없는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고통 중에 나를 찾아온 사랑이 사랑 중에 가장 빛나고
고통 중에 나를 찾아온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뜨겁습니다.
그 사랑은 용광로의 불이 최고로 달아오르면 쇳덩이를 다 녹여
쇳물로 만들어버리듯 고통마저도 사랑으로 만들고 행복으로 만듭니다.
똑같은 세상인데 한 순간에 이렇게 만드실 수 있는 하느님을 만날 때,
그때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사순절의 한 가운데서 저는 지금 최고의 고통을 겪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며,
매일 저의 기도 안에서 기억하는 그분들을 생각하며,
이분들에게 그리고 제게도 이런 새로운 세상이 열리길 기도하며
오늘 이 묵상의 글을 저는 봉헌합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것이고"
생각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이 많은 가봅니다.
괴로워서든지 구원에서든지
"한 순간에 이렇게 만드실 수 있는 하느님을" 만난 것을
깨닫고 고백하기를 희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