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근원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버림을 받거나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지요.
오늘 이사야서에서 이런 인간의 두려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라고 시온이 말하였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죽음을 포함하여 생명이 위협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버림을 받는 것과 같이 사랑에서 제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버림을 받는 것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는데
상대가 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여 버림을 받는 경우와
사랑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망각으로 인해
버림을 받는 경우인데 망각을 한다는 것도 사랑 없음의 현상이지요.
망각은 미움이나 분노 같은 것 때문에 일시에 사랑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애초에 사랑이 없기에 자연스럽게 망각한 것이거나
사랑이 식어가면서 차츰 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보통 때는 없습니다.
보통은 인간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잊히는 것이 다반사이기에
인간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잊히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이는 형제나 혹 아비가 나를 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있어도
어미가 나를 버릴 거라고는 생각지 않기에 그런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지요.
그런데 큰 곤경에 처하고 사람들마저 다 나를 버리고 떠나고 난 뒤에야
하느님도 나를 버리셨는지 보게 되고,
그 곤경에서 구해 달라 애원을 했는데도 그대로일 경우 그 때
하느님마저도 나를 버리셨는지 또는 잊으셨는지 생각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거나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이요 가장 최종적인 두려움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위로를 주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버리거나 잊는 것이 하느님께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미의 사랑은 치매나 다른 뭣에 의해 손상이 되었을 경우
아기를 버리거나 잊을 수 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손상이 없을뿐더러 사랑이 하느님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이 사랑이 아닌 것을 할 수 없으니
하느님이 사랑 아닌 것을 한다면 하느님이 아니지요.
사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존재의 유무 차원에서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랑 차원에서 믿는 것이요 그것도 관념적인 사랑을 믿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려운 현실에서 그리고 모두가 나를 떠난 상황에서
하느님만은 나를 버리지 않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런 하느님의 사랑이 크게 느껴지고 절실한 것은
나이와 함께 건강도 떠나고
돈도 지위도 명예도 떠나고
자식도 친구도 사람들도 떠나고
이제 나 혼자 남던지 하느님과 남던지 하기 때문이겠지요?!
고통의 한 가운데 나 혼자 있을 때, 오늘 이 말씀이 위안이 되기를 빕니다.
저안에 깊숙이 숨겨진 근원적인 두려움에대해 묵상함의 필요성을 깨달게 해 주시네요. 선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