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과 시련
시련은 수용 자세에 따라 고통일 뿐일 수도 있고
단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의 경우 하느님께서 영적성장을 위해
이 시련을 주셨다고 받아들이면 영적인 단련이 됨도 봤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은 시련과 시험의 관계를 보고자 합니다.
시련이 시험일 수 있다는 뜻이고
이 경우 시험을 내는 또는 시험을 하는 주체가 있고
시험을 받는 주체가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적대자들이
예언자나 주님을 시험을 하고 주님과 예언자들은 시험을 받는데
그 시험이 뭐냐 하면 시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는 것은
인생 최대의 시련인데 성경은 여기서 분명히 이 시련의 목적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사실 시험이라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학생이 시험을 보고 시험이 어려웠다고 늘 얘기하는데
시험이 쉬우면 학생의 실력이 어느 수준인지 알 수 없기에
수준을 알기 위해 선생님은 언제나 시험을 어렵게 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시험은 어떤 시험이든지 어렵기/시련이기 마련이고
그 목적은 현재의 수준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 적대자들이 고통과 모욕으로 예언자를 시험하는데
그 이유가 예언자의 온유함과 인내력의 수준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더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이 시험의 더 큰 목적입니다.
시험의 일반적인 목적이 온유함과 인내력의 수준을 알기 위한 거 같지만
실은 그가 하느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기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여기서 저는 중요한 성찰을 합니다.
제가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시험을 영적으로 받을 것입니다.
우선 제가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고통과 모욕으로 시험을 받을 때
비록 사람들이 고통을 주고 모욕을 줄지라도
그것이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시험을 받을 때
고통과 모욕 외에 아무 것도 없지만
하느님의 아들은 고통과 모욕 가운데서 하느님이 발생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시험을 하느님의 아들답게 받을 것입니다.
즉 신앙이 없는 사람은 고통과 모욕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받아들이지만
하느님의 아들은 고통과 모욕을 하느님이 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내가 지금 하느님으로부터 시험을 받고 있고,
고통과 모욕이 그 하느님의 시험임을 알아채고
감사하게 그리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오늘이 되고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