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자!
요즘 이 말을 주문처럼 자주 되뇝니다.
특히 일터로 가면서 이 말을 되뇝니다.
그런데 이 말을 주문처럼 되뇐다는 것은 두려워한다는 것이고,
두려움도 다른 두려움이 아니고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의 반증인데
지금까지 접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
매우 거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낯설고 힘겨워 그런 측면이 있지요.
전에는 누구를 만나건 두려움보다 사랑이 앞서서
두려워할지라도 잘못 사랑할까봐 조심하는 정도의 두려움이었는데
이제는 그 사람을 과연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 염려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없던 두려움이 생긴 것은 순전히 제가 다른 상황에 처하고,
다른 부류의 사람을 만나는 오직 그 이유 때문이고
다른 이유나 원인은 없을까요?
그런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고,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더 큰 이유랄까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사랑의 힘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힘이 있어야 사랑도 함을 절감하는데
그것은 힘이 떨어지니까 싫어하는 것, 힘든 것, 귀찮은 것,
한 마디로 저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이나 사람들은
사랑은커녕 두려워 대면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싸울 힘,
이길 힘은 말할 것도 없고
견딜 힘 조차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요즘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주문呪文을 외우면서
저 자신에게 한 가운데로 들어가서 직면하라고 주문注文을 합니다.
자신들을 물어 죽이는 불뱀을 피하지 않고 매달아 달고 우러러 본
오늘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피하지 않고 직면하라는 거지요.
작은 예를 들면, 조그만 소음에도 예민하고 그래서 괴롭힘을 당하는 제가
작정하고 소음이 대단한 건설현장 한 가운데로 들어가니
오히려 시끄럽지 않고 그로 인해 괴롭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깨닫습니다.
고통의 가장자리에 있을 때 두렵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것이다.
아예 고통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면 오히려 평안하고 모든 것이 행복하다.
악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면 곧, 최악의 상태를 직면하면
최악도 평안하고 최악이 아닌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사실 소음 한 가운데 있다가 그리고 전투와 같은 현장 가운데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집의 고요와 평안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일 집이 고요하지 않고 집에 들어와서도 누구와 싸워야한다면
세상의 소음과 전투 한 가운데로 들어갈 힘을 얻지 못해 힘이 없겠지요.
그런데 사실 힘은 집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힘은 근원적으로 하느님께 있고,
영원히 하느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이것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