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것, 저런 것들’을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금요일에는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되고, 영성체 전 적어도 1시간 동안은 물과 약 외에는 어떠한 음식도 삼가야 되고, 형제들이 무엇인가를 부탁할 때는 되도록 들어주어야 하고, 공동체에서 결정한 사항들은 개인적인 좋고 싫음을 떠나서 지켜야 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들을 우리들은 왜, 그리고 어떠한 마음으로 이 지켜야하는가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엇인가를 지키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구분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공동체는 사순 기간 동안 하루 한 끼를 단식하기로 하겠습니다.’라고 결정을 한다면, 그 수와 비율과는 상관없이, ‘단식을 한 형제’와 ‘그렇지 못한 형제’로 나뉨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결정을 함에 있어서 분명히 해야 할 부분은, ‘우리들은 그러한 결정을 왜, 그리고 어떠한 마음으로 하였는가?’입니다.
우리들은 수도원 회의 때, 많은 것들을 공동체의 이름으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그 결정사항들을 잘 지켜달라고 당부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공동체가 지켜야 할 사항들을 결정합니까? 보다 나은 공동체를 위한 우리의 결정은, 누구를 염두에 둔 결정입니까? 다른 공동체 형제들 보기에 보다 나은 공동체를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기에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보시기에 보다 좋은 공동체를 위해서입니까? 어떠한 일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우리 각자의 마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주위 시선에 비친 나의 모습, 아니면 스스로에게 보다 떳떳하고자 하는 나의 마음만이 앞선다면, 그러한 결정들은 스스로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있어서도 분열을 초래하게 만듭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모두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인간적인 욕심이 앞선 결정은, 그러한 결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배제하게 만듭니다.
인간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인간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마음을 마지막까지 유지한다는 것은 더욱이나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으며, 늘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도와주십사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늘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고 포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계명을 온전한 마음으로 실천할 용기도, 수행할 능력도, 계명을 어긴 뒤에 다시 그 분께로 돌아올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 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몸담고 살아왔던 이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살아가셨던 그러한 가치를 선택하고, 나의 것으로 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때로는, 그러한 나의 결심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몇 번의 도전 후에 ‘나는 그렇게 할 힘이 없어’라고 포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금도 힘겹게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들의 그러한 모습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나에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또는 그러한 마음에서 모든 일을 결정하고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겸손되이 성령님께 도우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 자신을 그 분께로 이끌어 주십사고, 당신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무엇인가를 지키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구분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공동체는 사순 기간 동안 하루 한 끼를 단식하기로 하겠습니다.’라고 결정을 한다면, 그 수와 비율과는 상관없이, ‘단식을 한 형제’와 ‘그렇지 못한 형제’로 나뉨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결정을 함에 있어서 분명히 해야 할 부분은, ‘우리들은 그러한 결정을 왜, 그리고 어떠한 마음으로 하였는가?’입니다.
우리들은 수도원 회의 때, 많은 것들을 공동체의 이름으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그 결정사항들을 잘 지켜달라고 당부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공동체가 지켜야 할 사항들을 결정합니까? 보다 나은 공동체를 위한 우리의 결정은, 누구를 염두에 둔 결정입니까? 다른 공동체 형제들 보기에 보다 나은 공동체를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내가 생각하기에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보시기에 보다 좋은 공동체를 위해서입니까? 어떠한 일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우리 각자의 마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주위 시선에 비친 나의 모습, 아니면 스스로에게 보다 떳떳하고자 하는 나의 마음만이 앞선다면, 그러한 결정들은 스스로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있어서도 분열을 초래하게 만듭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모두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인간적인 욕심이 앞선 결정은, 그러한 결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배제하게 만듭니다.
인간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인간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마음을 마지막까지 유지한다는 것은 더욱이나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으며, 늘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도와주십사고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늘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고 포용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계명을 온전한 마음으로 실천할 용기도, 수행할 능력도, 계명을 어긴 뒤에 다시 그 분께로 돌아올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 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몸담고 살아왔던 이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시고 살아가셨던 그러한 가치를 선택하고, 나의 것으로 하고자 결심하였습니다. 때로는, 그러한 나의 결심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몇 번의 도전 후에 ‘나는 그렇게 할 힘이 없어’라고 포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금도 힘겹게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들의 그러한 모습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나에게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또는 그러한 마음에서 모든 일을 결정하고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겸손되이 성령님께 도우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 자신을 그 분께로 이끌어 주십사고, 당신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의 다시 태어난 새로난 삶이란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삶'..
'어떻게 순종해야 내 삶에 하느님이 더 분명히 나타날 수 있을까?'..
내 자신을 포기한만큼 그 분은 자연스럽게 나타나시며
나는 그 분의 나타나심을 보고 즐거워하기만 하면 되는 삶..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뿌리박혀 있을때만이 가능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