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내쫓았다.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모독하는 말을 듣고 지방에서 쫓겨납니다.
이때 보통 사람들은 평정심을 잃고 맞대응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은 분노하고 몸은 거칠게 저항합니다.
반면 도를 닦아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아무리 모욕이나 모독을 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정平靜, 평안平安, 선정禪定의 상태를 유지합니다.
내공이 대단하여 아무리 밖에서 흔들어대도 고요와 평안을 유지하는 거죠.
제가 인도에 갔을 때 아주 황당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저희 형제가 유학할 바라나시 대학을 보러
인도 형제와 함께 바라나시라는 곳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하나는 힌두 사원에 맨발로 들어가야 하는 것을 몰라
신을 신고 들어갔다가 경찰한테 인도 형제가 두들겨 맞은 건이고,
다른 하나는 저를 태우고 가던 뤽사 운전사가 교통경찰에게 걸려
이유도 없이 싫건 두들겨 맞은 건입니다.
저는 같은 날 두 건을 경험케 되었는데 외국인 앞에서도
그런 폭력을 행사한 인도경찰의 그 야만성에도 놀랐지만
저를 더 놀랍게 한 것은 그런 폭력을 당하고 난 뒤
인도 신부와 뤽샤 운전사가 보여준 모습이었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처럼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No Problem이었고 아무 일 없었음이었는데,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이것은 밖에서 아무리 흔들어대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 바로 그것이었고
이것을 도를 수없이 갈고 닦은 사람들이 보여준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이는 모욕을 줘도 모욕으로 받지 않는 이사야서 야훼의 종과 같은 경지인데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보여준 것은 이런 것과는 결이 좀 다른 겁니다.
그저 고요하고 평온한 것이 아니라 기쁘고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고요와 평온 또는 평화는 수양적修養的인 것이지만
기쁨과 성령 충만은 관계적이고 인격적인 것입니다.
고요와 평온은 어쩌면 관계를 끊는 데서 오는 것이요,
악영향이 내게 미치는 것을 차단하고 마는 것이지만
기쁨과 성령 충만은 상대가 원치 않으면 관계를 끊어주지만
이런 관계를 능가하는 다른 중요한 관계는 유지되고 있기에
그 근본적인 관계 안에서 얻게 되고 누리는 만족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쫓겨날 때 사도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원치 않으니 먼지를 털어버리는 떠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기쁨으로 충만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하는 짓은 발의 먼지쯤으로 여기는 것이고,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대만족하는 것입니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얘기한 참되고 완전한 기쁨과 정확히 일치하는 겁니다.
프란치스코는 인간이 어떠한 모욕을 주고 고통을 주어도
하느님 사랑 때문에 그것을 달게 참아 받을 뿐 아니라 기뻐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참되고 완전한 기쁨이라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얘기했지요.
오늘 이렇게 묵상을 하고 나니 며칠 전
제가 어떤 분에게 했던 충고가 너무 부족했음을 느낍니다.
제가 알기로 그분은 좀처럼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분인데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남을 미워하게 되었고,
그래서 잘못을 범한 사람은 태평한데 그분만 괴로워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 나의 죄가 되지 않게 차단하시라고
충고를 해드렸는데 이것이 잘못된 충고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아주 잘 한 충고라고는 할 수 없는 충고요 부족한 충고였습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매우 소극적인 대처법을 얘기한 것이지
사랑으로 해결하시라는 적극적인 대처법을 얘기한 것이 아니었지요.
그러므로 상책上策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고,
마음이 평온한 것이 아니라 기쁨이 충만한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신부님의 맑음을 닮고 싶은 제자입니다.
감사합니다.
따르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