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내게 붙어 있어라.
많은 열매를 맺어라.
그런데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나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이나
내용상 같은 것이니 굳이 따로 구분하여 얘기할 필요는 없고,
그러나 그 의미를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오늘 비유의 내용인즉슨 열매 맺는 가지만 소용이 있고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소용이 없기에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쳐 버리시는데 그때는 포도나무인 주님도 어쩌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이렇게 우리에게 들립니다.
우리는 애를 써야만 주님 안에 머무를 수 있고
나무에 붙어 있고 열매 맺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다른 가지들과 경쟁해야 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실제로 나무의 생태를 보면 모든 가지들이 저절로 붙어 있고
저절로 열매 맺는 것이 아니고 치열하게 경쟁해야 붙어 있을 수 있습니다.
열매에 쭉정이가 있는 것처럼 가지에 삭정이가 있는데
가지가 삭정이가 되는 것은 다른 가지와의 경쟁에서
불행히도 햇빛을 받지 못해 그리 된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경우도 주님 안에 머물고 붙어 있기 위해서는
애를 쓰고 경쟁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서 잘린 가지가 되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지요.
주님 안에 머물거나 붙어 있기 위해서는
아무 애를 쓸 필요가 없고, 경쟁을 할 필요는 더더욱 없지요.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태평하게 머물기만 하면 되고,
싫다고 발버둥 치며 다른 곳에 가려고 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사실 햇빛을 좋아하고 쬐고자하는 나뭇가지처럼
우리가 주님 사랑을 싫어하지 않고 좋아하기만 해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빛을 주시는 주님께서
부족함 없이 아니, 넘치게 사랑을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차지하거나 쟁취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저 누리면 되는 것인데 그 사랑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것이기에
굳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좋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할 경우는 물론 다르지요.
주님 사랑 안에 머물고 사랑을 받는 것은
하느님 사랑이 내가 좋아하는 취향이기만 하면 되지만
내가 누구를 사랑할 경우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한 것이고,
나 중심이 아니라 그 중심이기에 나의 희생이나 고통이 없을 수 없고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 싫은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되지요.
그러니까 사랑을 받는 것은 그 사랑을 좋아하기만 하면 누릴 수 있지만
사랑을 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이건 이웃 사랑이건
싫은 것을 감수甘受해야 되고 싫어도 기꺼이 해야 한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오늘 당신 안에 머물면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면 열매를 저절로 맺는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되고,
주님 사랑을 받으면 사랑도 저절로 잘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일까요?
저절로는 아닐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힘, 사랑을 할 수 있는 기초체력이 주어진다는 뜻일 겁니다.
싫은 것도 감수코자 하는 사랑의 의지를 가지고 우리가 감히 도전을 한다면
사랑을 하면 할수록 받은 사랑이 하는 사랑이 되어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고 수난의 사랑도 할 수 있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받은 사랑이 하는 사랑이 되도록
사랑의 의지를 가지고 도전을 시작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