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며칠 전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이를 낳은 젊은 엄마들끼리 모임을 갖는데
같은 산후 조리원에 있었던 어마들이 퇴원 후에도 같이 만난다는 겁니다.
산후 조리원에 긴 기간 같이 있었던 것 분명 아닐 텐데
그렇게 친한 친구들이 되어 정기적으로 또는 자주 만난다는 것은
아이를 낳은 엄마들의 특별한 유대감 때문일 것입니다.
곧 아이를 낳았다는 특별한 기쁨이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있어서
그들에게는 동질감이 있을 뿐 아니라 그 기쁨을 맘껏 나눌 수 있고
또 아이 키우는 기쁨이나 육아정보도 같이 나눌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기쁨이란 원하는 것을 갖게 되었을 때 오는 만족감이기에
소유하게 된 것이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으면 그럴수록 더 큰 법이며
그런 큰 기쁨을 서로 이해하며 맘껏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기쁨이 더욱 배가되고 그 기쁨을 누릴 수 있기에 서로 찾게 마련이지요.
기쁨이란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오히려 슬프잖아요?
그 힘든 사법고시에 붙었는데 진정 같이 기뻐해 줄 어머니가 돌아가셨거나
아들이 대학에 붙었는데 주변 친구들의 아들들은 다 떨어졌다면
기뻐할 수 없는 기쁨이 되어 그 기쁨이 기쁨답지 않게 되기도 하지요.
언젠가 같은 수험생을 둔 엄마 둘이 제게 와서 미사 부탁을 하였는데
둘 중의 하나만 대학에 합격을 하였지만 그 기쁨을 주체할 수는 없고,
마땅히 나눌 사람이 없어서 하필이면 떨어진 친구에게 자랑했다가
절친한 친구 사이가 그만 소원해지게 됐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쁨이란 이토록 참을 수 없는 것이며 나누게끔 되어있고
그래서 우리의 복음도 정말 내게 기쁜 소식이라면
누군가에게 전하거나 나누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법이고,
그러니 나누지 않는다면 복음이 정말 내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는 표시지요.
그래서 방문 축일의 의미를 이 관점에서 더 생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왜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방문치 않고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까 생각해보는 거지요.
마리아가 젊기 때문에 방문했을까요?
아니면 마리아만 엘리사벳의 임신사실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마 마리아가 더 기뻤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기쁨으로 인해 마리아가 더 행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이 성령에 가득 차 외칠 때
여인 중에 가장 복되고 그래서 당신은 정녕 행복하시다고 했지요.
오늘 복음의 표현들과 둘이 처한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들이 왜 만났고 기쁨이 어떤 것인지가 잘 드러납니다.
이들의 기쁨은 일반 어미들의 인간적인 기쁨이 아니고
주님을 잉태하고 주님의 예언자를 잉태한 성령의 기쁨으로서
이런 기쁨을 다른 사람과는 나눌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이 기쁨을 이해하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을 잉태한 자의 그 성령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엘리사벳에게 간 것이고
엘리사벳만이 이 성령의 기쁨을 공유하고 이해하기에 간 것입니다.
이 기회에 성찰합니다.
나도 주님을 잉태한 자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누구를 방문한 적이 있는가?
나는 구원의 기쁨 또는 성령의 기쁨 때문에 누구를 방문하는가?
내가 엘리사벳처럼 방문을 받는다면 어떤 방문을 주로 받는가?
가지도 오지도 않고 혼자 꽁꽁 집안에만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