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오늘 열왕기는 제가 사랑하는 성경 얘기 중의 하나입니다.
엘리야의 하느님 체험 얘기이기도 하고
저의 하느님 체험 이해에 큰 도움을 준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엘리야의 이 하느님 체험을 따라가면 좋을 것입니다.
우선 우리도 엘리야처럼 나와야 하는데
두려움에서 나와야 하고 자신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산 호렙에 와서 동굴에 머물며 밤을 지냈습니다.
갈멜 산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그들을 쳐 죽이고
왕비 이세벨에게 쫓겨 하느님의 산으로 피신한 거였으니
어쩌면 두려움 때문에 동굴로 숨어 든 것일지 모릅니다.
두려움은 나를 해치거나 위협하는 존재를 두려워하는 거지만
근본적이고 내면적으로는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이지요.
이판사판 죽을 각오를 한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죽어야 할 자기가 살아있어서 두려운 것입니다.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은 다 자기가 살아있는 표시인데
동굴에서 나온다는 것은 자기를 깨고 나온다는 뜻이고,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도
두려움과 부끄러움 등 모든 자기에게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다음으로 하느님께서는 산 위에 서라고 하십니다.
구약에서 산 위는 하느님께서 계신 곳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기도하러 산에 가셨다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호렙 산에서의
하느님 체험이 첫 번째 하느님 체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권력자와 450명의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을 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체험 없이 대결을 벌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번 호렙 산에서 하느님 체험은 또 다른 체험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체험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느님 체험을 분명 했지만 어느 순간 하느님은 떠나가 버리시고
안 계신 것 같기도 하고 무미건조하기도 하며
특히 고통과 두려움의 순간에 하느님은 나를 외면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하느님 체험을 분명 했고 그래서 강의 때 그 체험을
우려먹기도 하지만 사람을 두려워할 때가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오늘 엘리야처럼 하느님 체험이 다시 필요한 겁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엘리야처럼 하느님을 만나러 산에 가고
주님 앞에 서야 하는데 하느님을 만나러 산에 가고
주님 앞에 선다는 것은 곱씹을 만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러 산에 간다는 것은 피정 가듯 가쁜하게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을병이 든 사람이 끙하고 일어나 의사를 만나러 가듯
두려움 때문에 골방에 처박혀 있을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가는 것이며,
주님 앞에 선다는 것도 전전긍긍하며 두려움 앞에 떨고 있지 않고
이를 악물고 주님 앞에 서 있으려는 태도입니다.
이런 묵상을 하다보니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신 성모 마리아가 즉시 연상되고
성녀 글라라가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그대의 정신을 영원의 거울 안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혼을 영광의 광채 안에 두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하느님 본질의 형상 안에 두고 관상을 통하여
그대 자신 전부를 그분 신성의 모습으로 변화시키십시오.”(편지 3,12-3)
그런데 엘리야가 이렇게 주님 앞에 섰을 때
강풍, 지진, 불로 상징되는 굉장한 현상들이 일어나는데
그것들 안에서는 엘리야가 하느님 체험을 못하고
오히려 부드러운 바람 가운데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뭘 말하는 것입니까?
마침 지금 천둥번개를 치며 비가 내리고 있는데
하느님은 우당탕탕 오시지 않고 조용하게 오신다는 얘기고
그러기에 우리의 영적 감수성이 겸손해져야 한다는 얘깁니다.
오실 테면 하늘을 쪼개고 오십시오라는 교만한 감수성으로는
지금 내리는 비처럼 우당탕탕 오셔도 하느님을 만날 수 없고,
매일 뜨는 해와 늘 있는 공기와 바람처럼 겸손하게 오셔도
만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