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 사랑을 이야기 하십니다.
하지만 그 원수 사랑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삶에서 매번 경험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 어떤 다른 것보다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보니 저는 고해소에서
누구를 미워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분에게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시라고 말씀드리지 못하는 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원수 사랑에 대한 이유가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람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사람에게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에게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라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하시니까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하느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쉽게 그렇게 행동하지 못하는
우리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을
질책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십니다.
당신 스스로 완전하게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완전하게 존재할 수 없습니다.
즉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 스스로 완전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의 다른 구절에서
완전한 자에 대한 언급이 다시 나오는 부분은
'하느님 나라와 부자' 이야기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서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을 묻습니다.
그 질문에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과 더불어
그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즉 완전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난이 필요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의 가난을
온전히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그들 또한 한계를 지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결국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께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계속 의지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우리는 모두 가난합니다.
우리 스스로 완전하게 존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가난함,
그 완전하지 못함,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고
우리는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못하는
그 모습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할 수 있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한 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수 사랑을
우리 힘으로 해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자책이 아닌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초대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가난 인정 의지 하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