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생각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 한 생각이 내 안이 있다면,
그 생각이 내 안에 자리잡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자리 잡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것처럼,
그 생각을 바꾸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선입견에도 작용합니다.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한 번 마음을 먹게되면,
그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물론 선입견이 있다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모습의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고
미리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 알맞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적은 정보를 가지고도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의 사람인지
파악하려 노력합니다.
그렇게 알게 된 그 사람의 모습이
내가 잘못 본 모습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을 가지고
파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대방의 모습은
그 사람 모습의 전부가 아닙니다.
또한 그도 사람이기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는 존재이기에,
그 모습이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습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애써 갖게 된 그 사람에 대한 모습을
바꾸기 위해서는
또 다시 애를 써야 되기 때문에
가능한 한 그 애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굳어진 하느님의 모습은
좀처럼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 모습이 온화하고 자비로운 모습이면 참 좋을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무섭고 두려운 모습의 하느님이
내 안에 자리잡고 있으면,
신앙 생활은 기쁘지 않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의무에만 매이게 되고,
그 의무에 충실하지 못한 내 모습에 시랑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청원 기도를 하면서,
들어달라고 이야기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경험하면서,
내 기도가 부족했다고,
내가 의무를 충실히 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부족한 인간임을 하느님 앞에서 겸손되이 고백할 때,
하느님께서 그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기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나의 부족함을 고백하기보다는,
의무를 다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탓하면서,
하느님께서 채워주시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의무의 이행을 통해 스스로 채우려고 합니다.
기적을 바라면서도
스스로 기적을 거부하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모습은 당연히 단편적인 모습,
하느님 모습의 이부분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과 대화를 통해서 나누면,
우리는 더 풍요로운 하느님의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더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가고,
그것을 통해 하느님과 더 깊은 관계에 들어갈 때,
우리는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