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복음을 묵상하다가 ‘목자 없는 양들’과 ‘기가 꺾여 있다’는
말이 눈에 들어오며 옛날의 저와 맞물리면서 이렇게 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김 레오나르도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애비 없는 자식으로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저의 유년시절 일부와 사춘기는 자신감이 많이 결여되어 있었고,
아버지가 안 계시기 때문에 기가 꺾여 있었습니다.
‘애비 없는 후레자식’은 저의 자극제도 됐지만 저를 짓누르는 것이기도 했고,
요즘 같은 장마에 저희 밭의 물을 잘 빠지게 하지 않아 옆집의 밭까지
물에 잠겨 옆집 아주머니가 따지러 왔을 때 변명하는 저희 어머니에게
‘서방 없는 한탄이나 하라!’고 퍼부은 폭언은 의식 무의식으로
저의 기를 꺾이게 하였고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다니던 저를
저의 큰 아버지가 보시고는 혀를 끌끌 차시기도 하셨지요.
그래서 이때 저희에게 조금이라도 잘해주는 남자가 있으면
그렇게 든든하고 고마웠으니 하물며 하느님은 저희에게 어땠겠습니까?
하느님이 안 계셨으면, 아니 하느님을 믿지 않았으면 저희는 정말
의지가지없었고 그래서 하느님은 진정 저희의 의지가지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와서 저희에게 의지가지가 없었던 것이
도리어 하느님이 저희의 의지가지가 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이곳 가리봉에서 살고 있는 것도 우선은
저 자신을 위한 거지만 이곳 분들에게 의지가지를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이분들의 의지가지가 되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분들의 의지가지가 되시게 하겠다는 뜻이지요.
가끔 동네산책을 하는데 몇 가지 이 동네의 특징이 있습니다.
식당과 술집이 다른 곳보다 더 많은 것은 그렇겠다 싶은데
이발과 손톱미용 가게가 유난히 많고 또 점집이 참 많습니다.
다른 동네에 가면 개신교 교회가 한 집 걸러 있는데
여기서는 점집이 개신교 교회들 마냥 집들에 이웃하여 있습니다.
그러면 왜 점집이 많이 있겠습니까?
뻔하지요. 삶이 고달프다는 애기고,
그래서 보통은 술을 먹으며 풀지만
위로와 의지가지가 필요하다는 얘기고,
그런데 하느님이 그들의 의지가지가 되지는 못하고
점쟁이가 그들의 의지가지가 되고 있다는 얘기지요.
그러면 왜 점쟁이가 하느님 대신 그들의 의지가지가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그들에게 하느님의 의지가지가 되어주지 못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의지가지가 되어줄 수도 없고,
우리가 그들에게 하느님 대신 의지가지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하느님의 의지가지가 되어 줄 수는 있고
또 되어주어야 한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들의 의지가지가 되어주지 못할/않을 때
그들은 오늘 에제키엘서에서 주님께서 꾸짖듯 우상을 섬길 것이고,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지 않으면 그들은 점쟁이들을 찾아갈 겁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당신을 대신할 일꾼이 적다고 주님 한탄하시고,
정말로 이곳도 추수할 것이 많은데
앞으로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초대하면 여러분이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여기에 주님의 일꾼으로 와 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