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인도 바라나시에 갔을 때
강가 강(갠지스 강)에 갔습니다.
강가 강은 인도 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강으로서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이곳에 순례를 오고 싶어 하는 강입니다.
와서는 이 물에 몸을 씻고 돌아갈 때는
이 물을 우리의 聖水처럼 가지고 돌아가곤 합니다.
자기들을 정화시킨다고 믿는 이 성스러운 물이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더러운 물이었습니다.
우리 물처럼 맑고 깨끗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아주 비위생적인 물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태우고 난 재를 이곳에 다 뿌리고 있었고
제가 배를 저어 강가 강 가운데 나아가니
동물 시체, 심지어 사람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물에 들어가서 몸을 닦고,
이까지 닦고 심지어 먹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더럽다고 하는 그 물을 성스럽게 여기는 그들을 보면서
저는 더럽고 깨끗하고를 구별하는 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구별합니다.
선과 악,
흑과 백,
밝음과 어두움,
아름다움과 추함,
聖과 俗,
깨끗함과 더러움.
그리고 이렇게 구별하는 제가 문제임을 느꼈습니다.
이런 區別知와 區別心이 문제입니다.
구별지와 구별심이 있을 때
우리에게는 좋고(好) 싫음(惡)이 생기고
우리가 싫어하고 거부하는 악, 어둠, 추함, 더러움이
오히려 우리에게 들러붙게 됩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이런 구별에서부터 차별이 생기고
사물의 가치 차별에서 인간에 대한 차별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모두가 선인데 악이 발생하고
모두가 존귀한데 어떤 사람을 비천한 존재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은 존중하고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어떤 사람은 더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덜 사랑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에 대한 차별은 대표적입니다.
오늘의 야고보서는 이런 차별이
우리의 사랑 계명을 깨는 큰 죄임을 지적하며
믿음의 부자가 되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가난한 우리를 골라
믿음의 부자가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난한 사람이란
돈이 없고,
아는 사람이 없고,
지식이 없고,
권력이 없고,
특히 오늘날에는 필요한 정보가 없는 사람들인데
이런 가난이란 것이 사실은 상대적인 가난이기 때문이고,
이런 것들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것들이 없다고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비참하고 불행하게 여기는 궁핍한 마음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믿음의 부자는 비록
가진 것 없어도 하느님께 다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으로 풍요롭고
가진 것 없어도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하여 이런 세상 것들의 있고 없음에 의해
존재의 귀천과 행불행이 좌우되지 않고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존중과 사랑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 늘 행복합니다.
강가 강(갠지스 강)에 갔습니다.
강가 강은 인도 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강으로서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이곳에 순례를 오고 싶어 하는 강입니다.
와서는 이 물에 몸을 씻고 돌아갈 때는
이 물을 우리의 聖水처럼 가지고 돌아가곤 합니다.
자기들을 정화시킨다고 믿는 이 성스러운 물이
제가 보기에는 너무나 더러운 물이었습니다.
우리 물처럼 맑고 깨끗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아주 비위생적인 물이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태우고 난 재를 이곳에 다 뿌리고 있었고
제가 배를 저어 강가 강 가운데 나아가니
동물 시체, 심지어 사람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물에 들어가서 몸을 닦고,
이까지 닦고 심지어 먹기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더럽다고 하는 그 물을 성스럽게 여기는 그들을 보면서
저는 더럽고 깨끗하고를 구별하는 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구별합니다.
선과 악,
흑과 백,
밝음과 어두움,
아름다움과 추함,
聖과 俗,
깨끗함과 더러움.
그리고 이렇게 구별하는 제가 문제임을 느꼈습니다.
이런 區別知와 區別心이 문제입니다.
구별지와 구별심이 있을 때
우리에게는 좋고(好) 싫음(惡)이 생기고
우리가 싫어하고 거부하는 악, 어둠, 추함, 더러움이
오히려 우리에게 들러붙게 됩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이런 구별에서부터 차별이 생기고
사물의 가치 차별에서 인간에 대한 차별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모두가 선인데 악이 발생하고
모두가 존귀한데 어떤 사람을 비천한 존재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은 존중하고 어떤 사람은 무시하고,
어떤 사람은 더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덜 사랑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에 대한 차별은 대표적입니다.
오늘의 야고보서는 이런 차별이
우리의 사랑 계명을 깨는 큰 죄임을 지적하며
믿음의 부자가 되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가난한 우리를 골라
믿음의 부자가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난한 사람이란
돈이 없고,
아는 사람이 없고,
지식이 없고,
권력이 없고,
특히 오늘날에는 필요한 정보가 없는 사람들인데
이런 가난이란 것이 사실은 상대적인 가난이기 때문이고,
이런 것들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것들이 없다고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비참하고 불행하게 여기는 궁핍한 마음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믿음의 부자는 비록
가진 것 없어도 하느님께 다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으로 풍요롭고
가진 것 없어도 하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하여 이런 세상 것들의 있고 없음에 의해
존재의 귀천과 행불행이 좌우되지 않고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존중과 사랑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 늘 행복합니다.
많은 선행으로 惡 이 밀려나가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