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오늘 주님께서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자들은 볼 수 있어 행복하고 들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찌 눈을 가지고 있는데도 어떤 눈은 보고 어떤 눈은 못 보며,
어찌 귀를 가지고 있는데도 어떤 귀는 듣고 어떤 귀는 못 듣는 걸까요?
우선 욕망과 욕심의 눈은 못 보고 가난의 눈은 보이는 대로 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진정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지상 것들을 멸시하고 천상의 것들을 찾으며,
살아 계시고 참되신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정신으로
항상 흠숭하고 바라보는 일을 그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욕심이란 마음이 욕망을 채우려는 마음이고,
그래서 욕망 때문에 깨끗하지 않은 마음이며
그래서 그런 마음의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말에도 눈이 있지만 돈에 눈이 멀고 욕심에 눈이 멀었다고 하지요.
돈만 보고 돈 밖에 못 보는 것인데 돈만 보기에
돈 밖에 있는 것은 있어도 아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욕망을 빼내 가난해지면
이는 마치 안경의 때를 닦으면 깨끗해지듯이 마음의 눈이 깨끗해져
하느님도 볼 수 있고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만의 눈은 보지 못하고 겸손의 눈은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습니다.
어제는 새벽 4시 30분에 행진을 출발하였습니다.
강론을 묵상하고 인터넷에 올리고 준비하여 떠나려니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금세 따라갈 테니 먼저 출발하라 하고 20분 뒤에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빛이 하나도 없어서 깊은 산 속에서 한 걸음 떼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한 5분 적응한 뒤에야 조심조심 걸어서 따라 잡았는데 이때
다시 깨달은 것이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는 거고,
빛이 없으면 아무리 당당하게 걸으려 해도 그럴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면서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는
오늘 화답송의 시편이 노래하듯 우리는 주님의 조명을 받아야 하고,
이렇게 겸손해야 함을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눈이 있으니 내가 눈을 감지만 않으면
볼 수 있으려니 교만하게 생각하는데 우리말에도 있듯이
교만하면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솔직히 깊은 산속에 혼자 있고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니
정말 무섭고 두려웠으며 주님이 옆에 계시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주님이 나의 빛이시고 나의 길 비추심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함에 대해서도 보겠습니다.
그런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이
귀가 있기는 하되 들을 귀는 없기 때문이고,
들을 귀가 없는 것은 입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에 ‘입만 살아가지고!’라고 비꼬는 말이 있습니다.
입만 살고 다른 것은 다 죽어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입만 살면 다른 것은 다 죽게 됩니다.
입만 살아있고, 눈, 코, 귀 모두 죽는 겁니다.
자기 말이 많은 사람은 말을 해야 하니 들으라고만 하고
들으려 하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한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하지만 그저 내 얘기, 내 요청만 늘어놓고
하느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들을 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들을 수 없는 기도를 하고서는
하느님께서 아무 말씀 않으신다고도 하지요.
이럴 경우 주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그런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이어야겠습니다.
순례중에도 아둔한 저희들에게
빛을 전해 주시니 신부님은 빛의
전달자, 평화를 전달하시는 목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