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試驗),
시련(試鍊),
단련(鍛鍊).
오늘 베드로 전서 1장을 묵상하며 세 말의 연관성을 생각해봅니다.
시험, 시련, 단련 모두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같습니다.
우선
시험은
현재 우리의 정도, 수준, 실력을 판가름합니다.
즉 성적을 매깁니다.
그 성적에 따라
어떤 사람은 아주 만족하고 자만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실망하고 의기소침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시험이 목적하는 바는
자만하고 안주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대비해 더 공부하라는 것이고
시험을 본 후에는 더 분발하라는 것입니다.
시련은
우리가 좋아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을 겪는 것은 나이지만
내가 스스로 겪는 것이 아니고
타의에 의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을 겪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보통 받는다고 하고
더 수동적이고 피동적으로 받을 때
시련을 당한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만큼 시련은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시련을 받을 때
우리의 수준, 정도, 실력이 드러납니다.
이런 면에서 시련은 시험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세례를 받고 난 뒤 집에 시련이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천주교를 믿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성당에 나가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이때 시련을 받는 사람의 믿음 정도가 드러납니다.
강한 사람은 그런 말을 일축하고 시련을 견디어 내지만
약한 사람은 그 믿음이 크게 흔들립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경우에는
서원이나 서품을 전후해서 친정집에 안 좋은 일이 생깁니다.
성소의식이 굳건한 사람은 아무런 흔들림이 없지만
성소의식이 약한 사람은 내가 나가서 해결해야 하고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닌가 하고 성소가 흔들립니다.
그러나
도 종환 시인의 시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고
시련 없이 단련이 없습니다.
시험이 현재의 실력을 판가름하지만
더 공부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듯
시련도 단련이 그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시련이 시련으로 끝나고 말지만
이것을 아는 사람은
시련을 통해 단련을 합니다.
시련의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시련을 내 스스로 겪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것이라면
시련을 주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 없는 운명 때문에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어떤 고약한 인간이 준다고 생각키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이 주신다고 생각키도 합니다.
운명이나 다른 나쁜 사람 때문에 시련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시련은 너무도 참혹하고 견디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 시련이 좋으신 하느님께서 주시고,
주시는 것도 금을 단련하듯 좋은 뜻으로 주신다고 믿으면
시련은 믿음을 단련하는 것이 되고
기쁘고 즐겁게 받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야고보서는
우리의 시련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시련을 주시는 뜻은
우리의 믿음이
순수해지고
굳건해져서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어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시련 중에도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며
저 세상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시련(試鍊),
단련(鍛鍊).
오늘 베드로 전서 1장을 묵상하며 세 말의 연관성을 생각해봅니다.
시험, 시련, 단련 모두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같습니다.
우선
시험은
현재 우리의 정도, 수준, 실력을 판가름합니다.
즉 성적을 매깁니다.
그 성적에 따라
어떤 사람은 아주 만족하고 자만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실망하고 의기소침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시험이 목적하는 바는
자만하고 안주하라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대비해 더 공부하라는 것이고
시험을 본 후에는 더 분발하라는 것입니다.
시련은
우리가 좋아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을 겪는 것은 나이지만
내가 스스로 겪는 것이 아니고
타의에 의해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련을 겪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보통 받는다고 하고
더 수동적이고 피동적으로 받을 때
시련을 당한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만큼 시련은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시련을 받을 때
우리의 수준, 정도, 실력이 드러납니다.
이런 면에서 시련은 시험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세례를 받고 난 뒤 집에 시련이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천주교를 믿어서 그렇게 된 것이니
성당에 나가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이때 시련을 받는 사람의 믿음 정도가 드러납니다.
강한 사람은 그런 말을 일축하고 시련을 견디어 내지만
약한 사람은 그 믿음이 크게 흔들립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경우에는
서원이나 서품을 전후해서 친정집에 안 좋은 일이 생깁니다.
성소의식이 굳건한 사람은 아무런 흔들림이 없지만
성소의식이 약한 사람은 내가 나가서 해결해야 하고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닌가 하고 성소가 흔들립니다.
그러나
도 종환 시인의 시처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고
시련 없이 단련이 없습니다.
시험이 현재의 실력을 판가름하지만
더 공부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듯
시련도 단련이 그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시련이 시련으로 끝나고 말지만
이것을 아는 사람은
시련을 통해 단련을 합니다.
시련의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시련을 내 스스로 겪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것이라면
시련을 주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 없는 운명 때문에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어떤 고약한 인간이 준다고 생각키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느님이 주신다고 생각키도 합니다.
운명이나 다른 나쁜 사람 때문에 시련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시련은 너무도 참혹하고 견디기 힘듭니다.
그러나 이 시련이 좋으신 하느님께서 주시고,
주시는 것도 금을 단련하듯 좋은 뜻으로 주신다고 믿으면
시련은 믿음을 단련하는 것이 되고
기쁘고 즐겁게 받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야고보서는
우리의 시련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시련을 주시는 뜻은
우리의 믿음이
순수해지고
굳건해져서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어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시련 중에도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며
저 세상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凡人 은 시련을 원망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