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을 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너무도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어머니 같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선 첫 번째 말씀,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오라는 말씀이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따듯하게 합니다.
‘오너라.’는 말씀은 지친 자녀를 ‘어서 오너라.’ 하시며 반겨 안으시는
어머니의 넉넉하고 따듯한 품이 느껴집니다.
‘모두’라는 말씀은 나 같은 사람도 빼놓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의지가 느껴져 우리를 안심케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없애 주겠다.’
‘고생을 면하게 해 주겠다.’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께서도 어머니의 마음처럼
우리의 무거운 짐도 벗겨주시고, 고생도 없애주시고 싶어 하실 것이고,
그럼에도 벗겨주시지 않고, 없애주지 않으시는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더 큰 사랑의 마음입니다.
짐을 벗겨주시는 마음도 사랑의 마음이지만
짐을 질 수 있는 능력을 키우시고자 하시는 마음이야말로
이를 악 무는 더 큰 사랑의 마음이겠지요.
주님께서는 다음으로 우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지는 고생을 하기는 하지만
마음만은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러시면서 어떻게 무거운 짐을 지면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그 방식이란 주님이 짐을 지는 방식이지요.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의 방법이랄까요?
그리고 그것이 편한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멍에가 편하면 짐이 가벼워집니다.
배낭이 몸에 딱 맞아 편하면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질 수 있음과 같습니다.
군에 있을 때 배낭이 불편하여 고생을 하다가
몸에 맞는 배낭을 메니
배낭에 많은 것을 집어넣고 구보를 하여도
훨씬 편하게 뛸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편한 멍에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지요.
거칠고 거세게 반항하고 거부하는 마음은
작은 짐도 견디기 힘듭니다.
처음 목줄을 매는 개가
목줄을 거부하면 할수록 더 목이 옥죄는 것처럼.
그러나 온순하게 받아들이면
더 큰 짐도 힘들지만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견딤을 통해 더 큰 힘이 생깁니다.
힘들다는 것은 힘이 들어오는 것이고
힘이 들어와야지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힘들고-힘내고의 역학 관계입니다.
겸손한 마음이면 더 편하게 더 많은 짐을 질 수 있겠습니다.
온유한 마음 이상으로
짐을 져야할 사람으로 자신을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짐을 져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여기는 순간,
‘왜 이것이 나에게?!’라는 마음을 거두는 순간,
자기가 지는 짐은 짐 또는 부담이 아니라
반기는 것 또는 어여쁜 것이 되고
짐을 지는 행위는 노역이 아니라 사랑이 됩니다.
온유와 겸손이 바탕이 되는 사랑의 마음,
이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너무도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어머니 같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선 첫 번째 말씀,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오라는 말씀이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따듯하게 합니다.
‘오너라.’는 말씀은 지친 자녀를 ‘어서 오너라.’ 하시며 반겨 안으시는
어머니의 넉넉하고 따듯한 품이 느껴집니다.
‘모두’라는 말씀은 나 같은 사람도 빼놓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의지가 느껴져 우리를 안심케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없애 주겠다.’
‘고생을 면하게 해 주겠다.’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께서도 어머니의 마음처럼
우리의 무거운 짐도 벗겨주시고, 고생도 없애주시고 싶어 하실 것이고,
그럼에도 벗겨주시지 않고, 없애주지 않으시는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더 큰 사랑의 마음입니다.
짐을 벗겨주시는 마음도 사랑의 마음이지만
짐을 질 수 있는 능력을 키우시고자 하시는 마음이야말로
이를 악 무는 더 큰 사랑의 마음이겠지요.
주님께서는 다음으로 우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지는 고생을 하기는 하지만
마음만은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러시면서 어떻게 무거운 짐을 지면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그 방식이란 주님이 짐을 지는 방식이지요.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의 방법이랄까요?
그리고 그것이 편한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멍에가 편하면 짐이 가벼워집니다.
배낭이 몸에 딱 맞아 편하면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질 수 있음과 같습니다.
군에 있을 때 배낭이 불편하여 고생을 하다가
몸에 맞는 배낭을 메니
배낭에 많은 것을 집어넣고 구보를 하여도
훨씬 편하게 뛸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편한 멍에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지요.
거칠고 거세게 반항하고 거부하는 마음은
작은 짐도 견디기 힘듭니다.
처음 목줄을 매는 개가
목줄을 거부하면 할수록 더 목이 옥죄는 것처럼.
그러나 온순하게 받아들이면
더 큰 짐도 힘들지만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견딤을 통해 더 큰 힘이 생깁니다.
힘들다는 것은 힘이 들어오는 것이고
힘이 들어와야지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힘들고-힘내고의 역학 관계입니다.
겸손한 마음이면 더 편하게 더 많은 짐을 질 수 있겠습니다.
온유한 마음 이상으로
짐을 져야할 사람으로 자신을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짐을 져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여기는 순간,
‘왜 이것이 나에게?!’라는 마음을 거두는 순간,
자기가 지는 짐은 짐 또는 부담이 아니라
반기는 것 또는 어여쁜 것이 되고
짐을 지는 행위는 노역이 아니라 사랑이 됩니다.
온유와 겸손이 바탕이 되는 사랑의 마음,
이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예,
걷지 못하시는 어머니를 업어드릴때 가졌던 마음입니다.
등에서 느낀 어머니의 여윈 뼈마디 온기로 주님 사랑을 알았지요.
돌아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짐은 짐 또는 부담이 아니라 사랑이 된다는 말씀 감사 합니다.
멍에를 해결하는 방법이 온유와 겸손이라는 방법도...
이제서야 조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온유하고 겸손한 사랑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