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조카들 영화 구경시켜주느라 저도 영화를 봤습니다.
그 당시 아주 인기를 끌었던 ‘취권’이라는 영화였지요.
본래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닌데다
무협영화는 내용이 대개 황당하고 유치해서 더더욱 잘 보지 않았는데
조카들 보여주기 위해 큰 기대 없이 봤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재미있기도 하였지만 배운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무림고수와 얼치기의 차이입니다.
영화를 보면 보통 얼치기들이 먼저 등장하여 행패를 부립니다.
얼마 안 되는 힘을 함부로 드러내고 아무렇게나 쓰는 것입니다.
그래도 무림의 고수들은 좀처럼 자기가 누군지 드러내지 않고
더더욱 자기 힘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얼치기들의 행패가 자기한테 향하면 피하거나 받아넘기기만 하지만
그 행패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도 도를 지나쳐 마을 전체가 위태롭게 될 때에야 힘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
얼치기는 자기 힘을 과시하고 폭력을 휘두르는데 힘을 쓰지만
고수는 힘을 감추다 구원하는데 쓴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지혜서는 이 면에서 아주 심오합니다.
힘과 자비와 심판의 관계를 아주 잘 말해주고 있는데,
우선 힘과 정의의 관계를 얘기합니다.
주님은 힘세시고 그 힘이 정의의 원천이라고 지혜서는 말합니다.
주먹 세계에서도 힘이 곧 정의이고
세속 사회를 봐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 곧 정의이듯
모든 것은 힘센 사람 뜻대로 되는 것이며 그것이 그 세계의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힘은 이 세상 정의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세상 권력과 하느님의 힘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힘이 順理의 힘이기에 느껴지지 않는 힘인데 비해
세상 권력은 보통 하느님과 백성을 거스르는 힘이기에
요즘 볼 수 있듯이 힘이 힘으로 행사되고 폭력으로 느껴집니다.
이는 마치 흐르는 물을 결대로 따르면
順理가 곧 엄청난 힘이 되어
엄청난 무게의 화물을 힘 안들이고 실어 나르지만
거스르면 그야말로 無理함으로 인해
힘이라고 내는 것이 힘이라고 할 수도 없고
조금도 나아가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거스르기에 힘이 드는 것이면서
남이 자기 뜻을 거스르고 자기를 힘들게 한다고
남을 심판하고
남을 억압하고
남을 제거하는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힘은
순리의 힘이고 구원과 생명의 힘입니다.
순리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그 힘을 느끼지 못하고 생명을 살아갑니다.
순리를 거스르면 고통과 힘겨움이 거스름의 대가로 따르지만
거스른다고 구원을 포기하고 생명을 앗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지혜서는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당신께서는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다.” 얘기한 다음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다.”고 얘기합니다.
힘이 달릴 때 기를 쓰고 힘을 내고
힘이 달릴 때 힘든 상황을 빨리 끝내기 위해 포악하게 힘을 쓰지만
힘의 주인이며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할 능력이 있으신 하느님은
만물을 소중히 여기시고
관대하고
심판에 더디십니다.
오늘 복음의 하늘나라와 하늘나라의 주인님은 밭에 뿌려진 가라지에
호들갑을 떨지도 포악하지도 않습니다.
넉넉하게 기다려보시겠다 하십니다.
그 당시 아주 인기를 끌었던 ‘취권’이라는 영화였지요.
본래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 아닌데다
무협영화는 내용이 대개 황당하고 유치해서 더더욱 잘 보지 않았는데
조카들 보여주기 위해 큰 기대 없이 봤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재미있기도 하였지만 배운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무림고수와 얼치기의 차이입니다.
영화를 보면 보통 얼치기들이 먼저 등장하여 행패를 부립니다.
얼마 안 되는 힘을 함부로 드러내고 아무렇게나 쓰는 것입니다.
그래도 무림의 고수들은 좀처럼 자기가 누군지 드러내지 않고
더더욱 자기 힘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얼치기들의 행패가 자기한테 향하면 피하거나 받아넘기기만 하지만
그 행패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도 도를 지나쳐 마을 전체가 위태롭게 될 때에야 힘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
얼치기는 자기 힘을 과시하고 폭력을 휘두르는데 힘을 쓰지만
고수는 힘을 감추다 구원하는데 쓴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지혜서는 이 면에서 아주 심오합니다.
힘과 자비와 심판의 관계를 아주 잘 말해주고 있는데,
우선 힘과 정의의 관계를 얘기합니다.
주님은 힘세시고 그 힘이 정의의 원천이라고 지혜서는 말합니다.
주먹 세계에서도 힘이 곧 정의이고
세속 사회를 봐도 권력을 가진 사람이 곧 정의이듯
모든 것은 힘센 사람 뜻대로 되는 것이며 그것이 그 세계의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힘은 이 세상 정의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세상 권력과 하느님의 힘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힘이 順理의 힘이기에 느껴지지 않는 힘인데 비해
세상 권력은 보통 하느님과 백성을 거스르는 힘이기에
요즘 볼 수 있듯이 힘이 힘으로 행사되고 폭력으로 느껴집니다.
이는 마치 흐르는 물을 결대로 따르면
順理가 곧 엄청난 힘이 되어
엄청난 무게의 화물을 힘 안들이고 실어 나르지만
거스르면 그야말로 無理함으로 인해
힘이라고 내는 것이 힘이라고 할 수도 없고
조금도 나아가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거스르기에 힘이 드는 것이면서
남이 자기 뜻을 거스르고 자기를 힘들게 한다고
남을 심판하고
남을 억압하고
남을 제거하는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힘은
순리의 힘이고 구원과 생명의 힘입니다.
순리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그 힘을 느끼지 못하고 생명을 살아갑니다.
순리를 거스르면 고통과 힘겨움이 거스름의 대가로 따르지만
거스른다고 구원을 포기하고 생명을 앗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지혜서는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당신께서는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다.” 얘기한 다음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다.”고 얘기합니다.
힘이 달릴 때 기를 쓰고 힘을 내고
힘이 달릴 때 힘든 상황을 빨리 끝내기 위해 포악하게 힘을 쓰지만
힘의 주인이며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할 능력이 있으신 하느님은
만물을 소중히 여기시고
관대하고
심판에 더디십니다.
오늘 복음의 하늘나라와 하늘나라의 주인님은 밭에 뿌려진 가라지에
호들갑을 떨지도 포악하지도 않습니다.
넉넉하게 기다려보시겠다 하십니다.
-매 순간 가라지일 수도 밀 일수도 있는 저를 기다려주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