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가 열매 맺듯이 말씀이 열매를 맺는다 함은 어떤 뜻인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열매를 맺는다 함은 양적인 것을 뜻하는가?
열매란 씨앗, 즉 시작과 근원에 대한 결과, 결실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라는 씨앗의 열매는 어떤 것일까?
먼저 하느님의 말씀은 가르침이고 깨우침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가르침이고 깨우침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대해 가르쳐주셨는데도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른다고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제일 중요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열매 무성해도 변변한 열매가 없는 것에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우리의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르쳐주셨는데도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면
이파리 무성해도 열매가 달리지 않는 것에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가르치는데도 깨우침이 다릅니다.
제가 양성소에 있을 때 똑같이 가르쳐주었는데도
어떤 형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형제는 곧이곧대로만 받아들이고
어떤 형제는 창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를 가르쳐도 열을 깨우치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어떤 마음 밭이냐의 문제입니다.
두 번째 하느님의 말씀은 명령입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시고,
그러나 그것도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해 그렇게 하라 하시는 것인데
우리는 그 명령이 싫습니다.
권고나 부탁을 한다면 혹 선심을 써서 해 줄 수 있지만
명령은 생래적으로 거부감이 있습니다.
시편의 저자가 하느님의 계명은 말부터가 입에 달다고 하였는데
이런 경우 하느님의 말씀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부하라는 말이 쓴 마음 밭에서는
합격의 기쁨과 영광이 없듯이
명령을 거부하거나 억지로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별로 거둘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의 언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사랑의 언표이시고
하느님께서 섭리하시고 마련하신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사랑인데
많은 경우 우리는 불감증 환자입니다.
한 번도 이것이 하느님 사랑이구나 하고 느낀 적이 없거나
느껴도 지나간 뒤에 사랑이었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래서 감사와 사랑의 응답이 없었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으로 풍성히 열매 맺지 못합니다.
어제는 우리 한우리 회원들과 함께 탈북자들의 얘기를 다루는
크로싱(Crossing)이라는 영화를 단체 관람하였습니다.
저는 시사회 때 보았기 때문에 두 번째 보는 것이었는데도
또 눈물을 많이 흘렸고
끝나고 인사를 드리니 남녀 불문하고 모든 회원들 눈이 발갰습니다.
그중에서 가슴에 남는 것 하나는
남쪽으로 내려온 주인공이 자기에게 잘 해주는,
사장이며 아마 교회의 장로인 듯이 보이는 분에게 절규하던 말입니다.
하느님은 남쪽에만 오시고 북쪽에는 오지 않으시느냐고,
지금 자기의 아내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남쪽에서는 공짜로 주는
그 결핵약을 기다리고 있다고 외치던 말이었지요.
지금은 경제가 어려워 우리도 살기 힘들다 하지만
그래도 북쪽에 비하면 모든 것이 과분하지요.
過分,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대로 풀이하면 넘치게 나누어졌다는 뜻이지요.
나에게 나누어진 몫이 지나치게 많다는 뜻이지요.
지나치게 나누어진 나의 몫을 북쪽과 나누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도 과분하게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하느님과 북쪽의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없다면 아주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열매를 맺는다 함은 양적인 것을 뜻하는가?
열매란 씨앗, 즉 시작과 근원에 대한 결과, 결실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라는 씨앗의 열매는 어떤 것일까?
먼저 하느님의 말씀은 가르침이고 깨우침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가르침이고 깨우침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대해 가르쳐주셨는데도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른다고 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제일 중요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열매 무성해도 변변한 열매가 없는 것에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우리의 인생이란 어떤 것인지,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르쳐주셨는데도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면
이파리 무성해도 열매가 달리지 않는 것에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가르치는데도 깨우침이 다릅니다.
제가 양성소에 있을 때 똑같이 가르쳐주었는데도
어떤 형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형제는 곧이곧대로만 받아들이고
어떤 형제는 창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하나를 가르쳐도 열을 깨우치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어떤 마음 밭이냐의 문제입니다.
두 번째 하느님의 말씀은 명령입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시고,
그러나 그것도 궁극적으로는 나를 위해 그렇게 하라 하시는 것인데
우리는 그 명령이 싫습니다.
권고나 부탁을 한다면 혹 선심을 써서 해 줄 수 있지만
명령은 생래적으로 거부감이 있습니다.
시편의 저자가 하느님의 계명은 말부터가 입에 달다고 하였는데
이런 경우 하느님의 말씀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부하라는 말이 쓴 마음 밭에서는
합격의 기쁨과 영광이 없듯이
명령을 거부하거나 억지로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별로 거둘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의 언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사랑의 언표이시고
하느님께서 섭리하시고 마련하신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사랑인데
많은 경우 우리는 불감증 환자입니다.
한 번도 이것이 하느님 사랑이구나 하고 느낀 적이 없거나
느껴도 지나간 뒤에 사랑이었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래서 감사와 사랑의 응답이 없었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으로 풍성히 열매 맺지 못합니다.
어제는 우리 한우리 회원들과 함께 탈북자들의 얘기를 다루는
크로싱(Crossing)이라는 영화를 단체 관람하였습니다.
저는 시사회 때 보았기 때문에 두 번째 보는 것이었는데도
또 눈물을 많이 흘렸고
끝나고 인사를 드리니 남녀 불문하고 모든 회원들 눈이 발갰습니다.
그중에서 가슴에 남는 것 하나는
남쪽으로 내려온 주인공이 자기에게 잘 해주는,
사장이며 아마 교회의 장로인 듯이 보이는 분에게 절규하던 말입니다.
하느님은 남쪽에만 오시고 북쪽에는 오지 않으시느냐고,
지금 자기의 아내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남쪽에서는 공짜로 주는
그 결핵약을 기다리고 있다고 외치던 말이었지요.
지금은 경제가 어려워 우리도 살기 힘들다 하지만
그래도 북쪽에 비하면 모든 것이 과분하지요.
過分,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대로 풀이하면 넘치게 나누어졌다는 뜻이지요.
나에게 나누어진 몫이 지나치게 많다는 뜻이지요.
지나치게 나누어진 나의 몫을 북쪽과 나누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도 과분하게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하느님과 북쪽의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없다면 아주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주님! 저에게 너무 많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