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기도하는 노파 (Old woman in praying, 1656)
작 가 : 니콜라스 마스 (Nicolaes Maes :1634- 1693)
크 기 : 캠퍼스 유채 (116 X 86cm)
소재지 : 네덜란드 암스텔담 레익스(Rijks) 박물관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6)
기도는 모든 종교인들의 호흡과 같기에 대부분의 종교가 그들이 믿는 신과의 가장 순수하고 열렬한 통교의 수단으로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간절한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근심과 불안을 덜어주고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감동을 주는 법인데 가톨릭교회는 기도의 전통에 있어 어느 종교 못지않게 심원하면서도 풍요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이 바치는 성무일도의 기도는 그 내용면에 있어 기도의 완벽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매일 수도자들의 공동체에서 바쳐지는 기도의 모습은 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다움 감동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서에는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 라는 권고로 기도란 바로 호흡처럼 우리 삶의 일상적인 것이 되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기도 중 특히 어려운 처지에서 어린이나 여인이 바치는 기도는 더 침통하며, 특히 연만한 여인의 기도는 더 숙연한 심정을 느끼게 만들며, 어느 기도 못지않게 하느님이 안배하셔서 기도하는 사람의 근심을 들어준다는 내용이 성서 여러 곳에서 제시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아들을 얻기 위해 늘그막에 바치는 한나의 기도가 그 대표이다. 사무엘 상권 1장에서는 아들을 낳지 못한 처지에 아들을 얻은 소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자, 설음에 북바쳐 하느님께 아들 하나를 점지해 달라는 한나의 기도는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게 만들고 있다.
이런 한나의 기도가 응답되어 사무엘을 낳게되자, 자식 낳지 못하는 여자라는 수모를 벗어나게 된 한나가 바치는 감사의 기도는 신약에서 예수를 잉태하고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만난 자리에서 성모님이 바친 아름다운 찬가의 모델이 되고 있다.
작가는 네덜란드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화가로서의 자질을 보이자 부모는 15살인 아들을 당시 네덜란드에서 그 진가를 인정받고 있던 렘브란트의 제자로 보내 그로부터 그림을 배우게 했다.
그는 렘브란트의 화방에서 스승의 천재적 기법인 명암의 대비법을 배워 빛의 처리를 통해 어둠과 빛을 구분하는 기술을 습득했다.
이것을 통해 그는 인생의 상반된 면,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평화와 불안 등의 상반된 감정 처리를 조용하면서도 힘 있게 표현함으로서 관객들의 작품 이해를 돕게 만들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크기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고, 특히 서민들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는 따스한 모습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작품의 주제는 이렇다하게 내세울 수 없이 너무 평범하다 못해 드러나지 않는 것이면서도 작품이 주는 감동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며, 어떤 성서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인으로서 가장 숭고한 표현인 기도의 내용을 너무도 감동적이면서 심원하게 표현하고 있다.
어떤 노파가 일인용 식탁에 앉아 식사 전 기도를 바치고 있다. 만고풍상을 겪어 고운 것과는 거리가 먼 투박한 얼굴과 거친 모습의 손은 그가 얼마나 척박한 인생을 살았는지를 알리는 이력서와 같다.
식탁이 일인용인 것을 보아 그는 자식도 없는 과부이거나 아니면 결혼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처지에서 독신녀로 살게 되었는지, 아무튼 아무도 보살필 사람이나 의지할 데가 없는 데가 없는 것이 현 처지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식탁에 올려져 있는 음식 역시 너무도 단순한 것이다. 두 덩어리의 빵, 연어인 듯 보이는 절인 생선 두 토막, 차 주전자 하나, 식사 전에 먹기 위한 국그릇 하나, 초라한 이런 것들이 고독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노파의 모습과 오버랩 되면서 더 서글프고 초라하게 보인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에서 렘브란트에서 배운 빛의 처리를 절묘하게 해서 이 식탁이 하느님을 향한 감사로 충만한 훈훈한 식탁으로 만들고 있다.
노파의 얼굴을 비추며 소박한 음식이 차려진 식탁에 쏟아지고 있는 빛은 이 식탁을 신앙의 경건함이 주는 기쁨의 분위기로 변모시키고 있다.
초라한 식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정갈하게 차려진 충만한 사랑이 담긴 천상 식탁의 예표처럼 맑으면서도 훈훈하게 보인다.
이 식탁의 노파는 비록 인간적으로는 외로운 처지일지라도 자신은 하느님의 사랑어린 보호 속에 살고 있다는 신앙적 확신 때문에 어떤 화사한 식탁에 앉은 사람들과도 비길 수 없는 조용한 행복을 느끼고 있다.
노파는 오늘 우리들에게 익숙한 손을 모운 자세로 기도하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기도하는 자세로 너무도 자연스러운 손을 모은 자세는 13세기부터 시작되었고 초 세기에는 양손을 들고 기도를 바쳤다.
이 노파는 어려서부터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몸에 밴 습관이었기에 한마디로 어느 수도자 못지않는 기도의 달인이며 다음 시편이 몸에 녹아 있는 크리스챤이다.
“주여 내 믿는데 당신이시고 ,어려서부터 나의 희망 주님 이외다 . 나이 늙어 이 몸을 버리지 마옵시고 내 기운 다하였을 제 던져두지 마옵소서.”(시편 71장 5,9)
식탁을 마주하고 있는 창가에 노파에게는 소중한 물품들이 놓여 있다. 식당이 원채 옹색하기에 이 공간이 노파가 보관해야 할 물건들을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납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읽다가 펴든 성경책이 보이는데, 노파의 인생을 비추는 등대 역할을 하는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시편 118편 105)
그리 평탄치 못했던 노파의 인생, 지금 역시 고독 속에 살아가는 노파에게 유일한 힘과 위안을 줄 수 있는 책이다.
그 앞엔 모래시계가 있는데, 이것은 네덜란드 개신교도들에게는 상당히 비중 있는 신앙의 표현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개신교 중에도 호전적이며 가톨릭 적인 것에 대한 적대감을 느끼기에 성화나 성상에 대한 거부감이 강해서 특별한 화풍을 창출했는데 이것이 바니타스(Vanitas)라는 그림이다.
인생의 허무를 강조하면서 물질적인 부유함에 대해 너무 우쭐하지 말 것을 권고하기 위해 인생의 유한성을 상징으로 모래시계를 많이 그렸는데, 노파 역시 살 인생이 그리 길지 않음을 알라는 교훈의 뜻을 전하고 있다.
기름병은 칠흑 같은 밤이 되었을 때 노파를 밝혀줄 등잔용 기름인데, 역시 성서와 같은 신앙적 의미를 지닌다.
벽에 걸린 열쇠 꾸러미는 노파가 살고 있던 집에서 쓰던 것이니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나 인간적으로 보면 암담한 노파의 내일에 약속된 밝은 면을 보이고 있다.
노파는 자신이 사랑하던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그리 쉽지 않던 인생이 끝났을 때 하느님께서 그를 천상 낙원에 들게 하시리라는 철석같은 믿음이 있기에 초라한 식탁 앞에서의 외로운 처지에서도 너무도 평온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이 작품은 어디에도 특징을 찾기 어렵고 비참한 것은 아니지만 너무도 평범해서 이렇다할 관심을 끌 것이 없는 것 같은 소재를 통해 기도 안에서 할 수 있는 삶과 신앙의 긍정적인 면을 너무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도란 하느님과의 가장 순수한 만남이기에 성서에서 가장 고귀한 기도는 골방에서 바치는 기도라고 가르치고 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6)
이 작품에서의 노파는 크리스챤 기도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너무도 조용하면서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종교에서 신의 은혜 체험으로서 기복성을 자주 강조하고 있으며, 종교가 미개한 단계에서는 이것이 신도 확보의 효과적 수단으로 행세하기도 한다.
성서도 기복적인 면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지만 기도의 궁극적 목표는 하느님의 보호 아래 놓인 자신을 발견하면서 하느님과의 합일의 경지에 드는 것을 말한다.
이런 경지에서는 기도가 하느님의 은혜를 살 수 있는 효과적인 보증 수표가 아니라 그냥 조건 없는 사랑의 표현임을 전하고 있다.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인 동전을 봉헌한 과부를 칭찬하신 주님처럼(루카 21:1-4) 이 작품에 등장하는 노파는 크리스챤 기도의 핵심을 찌르고 있기에 어떤 수도원에서 바치는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기도가 줄 수 없는 기도의 감동을 주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그림이긴 해도 옹색한 장소에서 초라한 식탁 앞에 앉은 노파의 모습, 창가에 있는 노파의 일용품등은 삶의 생기 보다는 서글픈 정서를 주는 것도 사실인데, 작가는 절묘한 빛의 처리를 통해 밝은 경쾌함을 선사하고 있다.
식탁보를 건드리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이다. 노파가 유일한 식구처럼 키우고 있는 고양이가 경건한 기도를 바치고 있는 노파와 달리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식탁을 할퀴고 있다.
기도가 끝난 노파가 이것을 보면 깜짝 놀랄 장면이며, 경건과 거리가 먼 해학적인 기쁨이 풍기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은 개신교 중에서도 가톨릭교회에 대해 부정적이고 호전적인 정서를 지닌 칼빈 주의의 배경에서 된 것이나 기도의 핵심을 너무도 정확하고 아름답게 표현했기에 특정 종교가 주고 있는 편견에서 해방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겐 어떤 종교적인 편견이나 오해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86년 이태리 아시시에서 있었던 세계평화를 위한 기도의 날에 요한 바울로 2세 교종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모든 진정한 기도는 각 사람의 마음 안에 신비로이 현존하시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라는 것을 이 노파는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야훼께 의지하는 이 시온 산 같으니 흔들림이 없으라, 항상 굳굳하여라.” (시편1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