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였다는 말로 끝납니다.
이 복음을 읽으면서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 사뭇 흥미로웠고
어떤 이유 또는 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길 원했는지,
왜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하였는지 사뭇 궁금했습니다.
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을까?
안드레아와 베드로처럼 구도의 차원에서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했을까?
자캐오처럼 자기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을까?
맹인처럼 시력을 되찾기 위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을까?
아니면 우리 보통 사람처럼 사람이 그저 그리워 보고 싶어 했을까?
이런 이유와 목적으로 만나고 싶어 하였다면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구원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지만 헤로데에겐 구원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헤로데의 관계에 대한 공관복음을 보면
루카 복음만이 독특합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 루카 복음에만 나오고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시기 전에 헤로데 앞에 서셨다는 것도
루카 복음에만 나옵니다.
여기서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 이유가 무엇인지 얘기하는데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만남으로 필요가 충족이 되고
만날 때 사랑과 미움을 주고받고
만남으로 기쁨과 슬픔이 발생하는 그런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소문대로 진짜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인지 궁금할 뿐
관계를 맺고자 하는 아무런 원의도 필요도 없는 그런 관계이고,
그저 호기심일 뿐입니다.
흥미 있게 보지만
마술이 끝나고 나면 돌아서 가고
돌아서 가면 곧 잊어버리는 그런 만남과 관계입니다.
감정이 투여되지 않는,
존재의 한 부분이 투여되지 않는
그런 관심을 우리는 많이 만납니다.
제가 북한 관계의 일을 하는 것을 알고는 이것저것 묻지만
묻는 것으로 끝나는 아주 허무한 관심을 저는 자주 만납니다.
정말로 그렇게 굶주리는지 묻고는
굶주리는 그들에 대해 아무런 연민도 발생치 않고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생각이 없는 관심 말입니다.
호기심 이상, 그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해서도 철학적 관심이 있지만
하느님이 전혀 발생치 않는 그런 관념적 만남도 있습니다.
이러한 헤로데였기에
예수님께서는 헤로데가 이것저것 묻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헤로데는 율법학자들과 수석사제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고는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조롱당한 예수님께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도 아무런 구원이 발생치 않은 빌라도가 불쌍합니다.
저 또한 빌라도처럼
예수님을 만나고도 아무런 구원이 발생치 않는,
그런 허무한 만남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 복음을 읽으면서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 사뭇 흥미로웠고
어떤 이유 또는 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길 원했는지,
왜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하였는지 사뭇 궁금했습니다.
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을까?
안드레아와 베드로처럼 구도의 차원에서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했을까?
자캐오처럼 자기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을까?
맹인처럼 시력을 되찾기 위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을까?
아니면 우리 보통 사람처럼 사람이 그저 그리워 보고 싶어 했을까?
이런 이유와 목적으로 만나고 싶어 하였다면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구원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지만 헤로데에겐 구원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헤로데의 관계에 대한 공관복음을 보면
루카 복음만이 독특합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이 루카 복음에만 나오고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시기 전에 헤로데 앞에 서셨다는 것도
루카 복음에만 나옵니다.
여기서 헤로데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 이유가 무엇인지 얘기하는데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을 보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만남으로 필요가 충족이 되고
만날 때 사랑과 미움을 주고받고
만남으로 기쁨과 슬픔이 발생하는 그런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
소문대로 진짜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인지 궁금할 뿐
관계를 맺고자 하는 아무런 원의도 필요도 없는 그런 관계이고,
그저 호기심일 뿐입니다.
흥미 있게 보지만
마술이 끝나고 나면 돌아서 가고
돌아서 가면 곧 잊어버리는 그런 만남과 관계입니다.
감정이 투여되지 않는,
존재의 한 부분이 투여되지 않는
그런 관심을 우리는 많이 만납니다.
제가 북한 관계의 일을 하는 것을 알고는 이것저것 묻지만
묻는 것으로 끝나는 아주 허무한 관심을 저는 자주 만납니다.
정말로 그렇게 굶주리는지 묻고는
굶주리는 그들에 대해 아무런 연민도 발생치 않고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생각이 없는 관심 말입니다.
호기심 이상, 그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해서도 철학적 관심이 있지만
하느님이 전혀 발생치 않는 그런 관념적 만남도 있습니다.
이러한 헤로데였기에
예수님께서는 헤로데가 이것저것 묻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헤로데는 율법학자들과 수석사제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고는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조롱당한 예수님께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도 아무런 구원이 발생치 않은 빌라도가 불쌍합니다.
저 또한 빌라도처럼
예수님을 만나고도 아무런 구원이 발생치 않는,
그런 허무한 만남을 계속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