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그날에는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오늘 독서와 복음 모두 눈 먼 이가 보게 되는 얘기이고,
복음은 믿는 대로 보게 되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그들이 믿음대로 보게 되었다는 관점보다는
갈망대로 보게 되었다는 관점에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제가 좋아하는, 아니 사랑하는 시편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이 시편을 가지고 한국 선율로
작곡까지 하고 한인 사제의 첫 미사 때 발표까지 한 시편입니다.
그 시편 중에서도 오늘은 다음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가 다른 것이 아니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고 그분 성전을 우러러보는 거라지 않습니까?
청하는 오직 한 가지가 천박하게 돈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다른 좋은 것도 많은데 그중에서도 주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라니
이런 청과 바람은 너무도 고상하고 참된 것이어서 실로 거룩합니다.
그리고 이 화답송을 오늘 독서와 복음과 연결시키면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못 보는 불편함과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단순히 육신의 눈을 뜨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는데 이제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거지요.
그러기에 이 화답송과 복음을 연결시켜 묵상하면서
즉시 우리는 이런 바람이랄까 갈망이 있는지 자연 성찰하게 되고
그래서 저를 성찰해봤는데 갈망이 그다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그분 빛 안에 있고, 이미 뵙고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나이 먹어가면서 모든 것에 무덤덤해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아름다움보다 다른 아름다움에 혹해 있기 때문일까요?
제가 저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제가
다른 아름다움에 미혹되어 주님 아름다움을 찾지 않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가장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갈수록 더 생각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인데 그렇다고 하느님보다 어머니가 더 보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저의 무덤덤해짐 때문이거나
이미 그분 빛 안에서 그분을 뵙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만해서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지만 지금 제게 주님은
오실 주님이 아니라 오신 주님이고 그래서
저는 이미 주님 빛 안에 있고 그래서 어두움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에서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이라고
노래하듯 이미 주님 빛 안에 있어 어두움이 없기에
주님 얼굴을 뵙고 싶은 갈망이 그리 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 아름다움 보고 싶은 갈망이 그리 크지 않음에
크게 근심 걱정할 것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심해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각오를 하고 있는데 제 앞날에 적어도 한 번은 하느님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며 하느님을 찾을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오늘 복음의 두 맹인처럼 큰 소리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제가 지금 크게 반성할 것은 사랑이 지극하면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데 그 정도의 사랑이 아니기에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어둠속에 있기에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갈망하면 더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