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믿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오늘 새벽같이 일어나 대전에 서울로 왔습니다.
교통경찰이 저 앞에서 음주단속을 하고 있어도.
술을 먹지 않으니 떳떳합니다.
속도 측정기가 앞에 있습니다.
규정 속도대로 달리니 움찔할 이유 없어 당당합니다.
우리의 세상살이는 법을 지키면 당당 떳떳합니다.
반대로
하지 말라는 것을 굳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신념대로 하니 떳떳합니다.
인간관계에서는 이렇게 자기 신념대로 하면
우선 자신에 대해서 떳떳하고
자신에 대해 떳떳하니 남에게도 떳떳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다릅니다.
아무리 내가 술을 먹지 않았어도
아무리 내가 나의 신념에 충실했어도
하느님 앞에서는 내가 의롭다, 떳떳하다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무라신 비유의 그 바리사이 같은 사람 외에는.
비유의 그 사나이는
우선 하느님 앞에 꼿꼿이 섭니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혼잣말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에 하라는 것 다 하였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했다고 의로움을 들이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만 칠뿐입니다.
그리고 죄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
바리사이도 세리도 자기 자신으로 의롭지 않고
자기 행위로 의롭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우리는 용서가 필요한 죄인,
자비가 필요한 불쌍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의롭게 되는 것이고,
그것도 자기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하느님의 용서를 믿고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믿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오늘 새벽같이 일어나 대전에 서울로 왔습니다.
교통경찰이 저 앞에서 음주단속을 하고 있어도.
술을 먹지 않으니 떳떳합니다.
속도 측정기가 앞에 있습니다.
규정 속도대로 달리니 움찔할 이유 없어 당당합니다.
우리의 세상살이는 법을 지키면 당당 떳떳합니다.
반대로
하지 말라는 것을 굳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의 신념대로 하니 떳떳합니다.
인간관계에서는 이렇게 자기 신념대로 하면
우선 자신에 대해서 떳떳하고
자신에 대해 떳떳하니 남에게도 떳떳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다릅니다.
아무리 내가 술을 먹지 않았어도
아무리 내가 나의 신념에 충실했어도
하느님 앞에서는 내가 의롭다, 떳떳하다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무라신 비유의 그 바리사이 같은 사람 외에는.
비유의 그 사나이는
우선 하느님 앞에 꼿꼿이 섭니다.
그리고 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사실은 혼잣말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에 하라는 것 다 하였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했다고 의로움을 들이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만 칠뿐입니다.
그리고 죄인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
바리사이도 세리도 자기 자신으로 의롭지 않고
자기 행위로 의롭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우리는 용서가 필요한 죄인,
자비가 필요한 불쌍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의롭게 되는 것이고,
그것도 자기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하느님의 용서를 믿고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