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어제 예수님 족보의 맨 끝에 요셉이 나왔는데
오늘은 요셉의 얘기입니다.
어제의 얘기가 예수님의 오심을 긴 역사를 통해
그리고 족보를 통해 준비한 것에 대한 얘기라면
오늘 얘기는 주님의 오심을 임박해서 준비한 사람에 대한 얘기이고,
오늘부터 성탄 때까지의 얘기들도 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임신한 사실을
꿈에 나타난 천사를 통해 알게 되고 그렇게 된 것이 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임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이 모든 일>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와 걸렸습니다.
이 모든 일이 마리아가 성령으로 임신하게 된 그 사실만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마리아와 약혼하게 된 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인지.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한 것은 분명
하느님께서 꿈에 나타나 약혼을 하라고 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서로 사랑해서 약혼을 한 것일 수도 있고,
양가 어른들이 결정해서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둘이 약혼한 것도 <이 모든 일>에 포함된다면
둘이 약혼한 것도 하느님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 되지요.
둘이 서로 사랑한 것이나 양가가 그리 결정한 것이나
인간들에 의한 것도 분명하지만 그것이 하느님의 뜻 안에 있었다는 거지요.
우리의 성소가 종종 그러하지 않습니까?
옛날에 먼저 신학교에 간 형이 방학 때 오면 달걀을 먹기에
달걀을 먹고 싶어서 동생이 신학교에 간 것인데 그것이 성소라고 하고,
그 형처럼 되고 싶어서 신학교에 갔는데 정작 그 형은 신학교에서 나올 때
형이 결국 나올 신학교에 들어간 것이 나의 성소를 위한 거라고도 하지요.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8장 28절에서 이렇게 얘기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아무튼 요셉은 마리아와 결혼을 하여 자기 자녀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려했는데 성령의 개입으로 모든 계획이 헝클어졌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의해 자기 계획이 다 깨졌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뜻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불행했을까요?
자기 나름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려했는데 그것이 깨졌으니
불행한 가정생활을 했을까요?
혼란의 시간과 받아들이는 고통이 얼마간 있었는지 몰라도
요셉은 불행하지 않았을 겁니다. 불행했다면
요셉이 예수의 양 아버지가 된 것은 희생이지 순종이 아니며,
모든 것이 서로 작용하여 선을 이룬 것도 아니고, 그저 악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서
한 사람만 제외되는 것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이 아닙니다.
모든 일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일어나야 하고,
요셉에게 일어난 모든 일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뜻에 기꺼이 동의하고 협력한 요셉을 본받아
우리도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봉헌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