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오늘은 태어날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 부부의 얘기입니다.
삼손의 부모 얘기도 독서로 같이 나오는 것이니 오늘 주제는
고목나무에서 꽃이 핀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능력의 하느님께서 꽃 피게 하시는 거지요.
그런데 즈카르야는 자기 부부에게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고,
그 아들이 큰 역할을 할 거라는 얘기를 천사로부터 듣고
늙은이에게서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합리적인 의심을 합니다.
사실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 있겠습니까?
늙어 갈수록 죽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은 육체적으로 죽음이 가까운 늙은이가
다른 것은 못해도 죽는 것은 잘 할 수 있다는 뜻도 있지만
영적인 죽음, 곧 자기를 버리는 그 죽음도
젊은 사람보다는 더 잘 죽을 수 있고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긴 해도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 있을까,
아니 나이를 먹어가는 제가 해야 할 것이 뭐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더니 이런 것이 즉시 떠올랐습니다.
헛소리, 잔소리는 하지 말고 조언은 하자!
인생의 경륜이 헛되지 않게 조언을 잘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자는 건데
그래서 이어서 생각되어진 것이 잔소리와 조언의 차이는 무엇인가?
둘 다 사랑에서 하는 것인데 무엇이 차이일까? 그거였습니다.
우선 잔소리는 가볍고 조언은 무겁습니다.
듣는 사람이 가볍게 듣고 무겁게 듣는 차이도 있지만
말하는 사람도 쉽게 내뱉고 신중하게 말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잔소리는 한 얘기 또 하고 반복적인데 비해
조언은 잘 생각하여 한 번 한 것으로 그치고 더 이상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복하는 이유가 잔소리는 꼭 그렇게 하게하고 싶은 것이 강한,
그러니까 욕심 때문인데 비해 조언은 그렇게 하면 좋겠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렇게 하고 안 하고는 상대에게 달렸고 나는 다만 그가 무엇을 식별하고
결정하는 데 그야말로 도움만 주겠다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도움이 안 되도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잔소리가 조언보다 더 사랑이 많은 것일 수도 있는데,
여기서 얘기하는 요지는 조언이 잔소리보다 상대의 판단을 더 믿고
상대의 결정을 더 존중하는 자세라는 점입니다.
사랑도 좋지만 사랑에 지혜가 따르지 않으면 위한다고 한 것이
요구가 되고 잔소리가 되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런 인간적인 차원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앞서 즈카르야가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고 했는데
신앙은 늘 합리적인 의심을 뛰어넘는 차원입니다.
그러므로 젊어서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살았다면
이제 늙어서는 의심을 넘어 믿으며 삽시다.
인간의 한계를 잘 알고 그 안에서 사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능력을 믿고 의탁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나이 먹어 자기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날뛰지도 말아야겠지만
인간의 한계에만 머물러 죽는 것만 기다리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 내가 날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넘는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내어드리면
늙은이도 즈카르야처럼 사랑의 온상이 될 수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저의 한계는 무한한 주님께 맡겨드립니다.